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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전주교구 복자 24위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5월 29일

윤지충 바오로

윤지충 바오로 (양반), 1759~1791

순교지 : 전주 풍남문 밖, 초남이

전라도 진산의 양반집안 출신인 윤지충은 고종사촌 정약용 요한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돼 1787년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프란치스코, 이종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그리고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자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 유언대로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러 종친들을 대노케 했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퍼져 조정에서는 진산 군수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피해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해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천주교 신앙을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자 진산 군수는 두 사람을 전주 감영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마침내 조정은 이들을 처형토록 했다. 윤지충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풍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권상연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권상연 야고보

권상연 야고보(양반), 1751~1791

순교지 : 전주 풍남문 밖, 초남이

권상연은 윤지충 바오로의 외사촌 형으로, 윤지충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는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했다.
1791년 여름 윤지충이 모친(권상연의 고모)상을 당하고 나서 '윤지충과 그의 사촌 권상연이 유교식 장례를 치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도 불태웠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조정에까지 전해졌다. 사태가 확산되자 진산 군수는 윤지충의 집을 찾아 사당에서 위패를 넣어두는 주독을 발견하고 열어보았으나 위패는 없었다고 한다. 체포령을 피해 한동안 숨어 있던 권상연과 윤지충은 윤지충의 숙부가 감금됐다는 소식을 듣고 관아에 자수했다.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했다. 전주 감영에서 두 사람은 갖은 문초를 겪으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자 전라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두 사람에 관해 보고했으며 조정에서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임금은 처형을 윤허했다.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풍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윤지충에 이어 참수 순교했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양반), 1756~1801

순교지 : 김제 장터, 초남이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전주에 살던 먼 친척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아이들의 스승이 되었다.
이후 유항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한정흠은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는 한편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폐지하였고, 1795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전주를 방문하였을 때 그로부터 성사를 받았다. 1801년 3월 유항검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았으며, 이곳에서 열심한 신자 김천애 안드레아와 최여겸 마티아를 만나는 행운도 얻을 수 있었다. 이어 동료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굳게 지키고 1801년 8월 고향 김제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김천애 안드레아

김천애 안드레아 (천민), 1760~1801

순교지 : 숲정이

고향을 알 수 없는 김천애 안드레아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신앙을 받아들인 뒤 안드레아는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진리에 대한 믿음이 남달랐으며, 교리의 가르침을 굳게 지킬 줄도 알았다. 그는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십계명을 버릴 수는 없으며, 한 번 죽는 것인 만큼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진술하며, 참수형으로 41세때 순교했다.
"천주교는 큰 도리요 지극히 훌륭한 행위로, 여러 해 동안 깊이 믿어 이미 뼛속까지 사무쳐 있습니다. (저에게) 형벌과 죽음은 영예로운 일이니, 어찌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범한 죄를 돌이켜보건대,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최여겸 마티아

최여겸 마티아 (양반), 1763~1801

순교지 : 고창 개갑장터

최여겸은 한산에서 체포된 후 감사의 명에 따라 무장으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았지만 굴하지 않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배교를 강요받았다. 옥중에서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와 김천애 안드레아를 만나 같이 한양으로 압송돼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는 "십계명을 버릴 수 없으니 죽음을 택하겠다."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순조실록'에는 "호남의 한정흠, 최여겸, 김천애 등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 그릇된 방면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천주를 독실하게 믿으며 교리를 따라붙어 익혀서 십계명을 버리기 곤란해 하고 죽음을 달갑게 받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울러 다시 자백을 받은 뒤 전주 감영으로 압송하여 각각 그 고을에서 사형에 처하소서."라고 기록되었다. 최여겸은 고향 무장으로 이송돼 1801년 8월 개갑장터에서 많은 장꾼들이 구경하는 때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양반), 1756~1801

순교지 : 전주 풍남문 밖

유항검의 출생지는 전주 초남이다. 지금의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서 당시 호남 부호였던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여 전라도에서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경기도 양근 권철신 암브로시오 집에서 천주교 서적과 십자고상을 접한 유항검은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박해 주도세력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 주동자로 유항검을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기에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조정은 유항검에게 대역부도죄를 적용, 능지처참형을 선고했다. 그의 가족들은 함께 처형되거나 각 지방 관청의 노비로 보내어졌고,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살던 집은 대역죄인의 집이라 하여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연못을 파서 집을 수몰시키는 파가저택(破家瀦宅)이 되었다. 전주로 이송된 그는 45세의 나이로 풍남문 밖에서 순교했다.

윤지헌 프란치스코

윤지헌 프란치스코 (양반), 1764~1801

순교지 : 전주 풍남문 밖

전라도 진산에서 학문으로 이름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가 형으로, 윤지헌은 1789년 윤지충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791년 형이 순교하자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된 윤지헌은 가족을 데리고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해 살면서 교회 서적을 베껴 읽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키곤 했다. 1795년 주문모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았고, 교회 밀사 황심 토마스를 북경에 파견하는 일에 동참했다. 1801년 체포되어 전주감영 옥에 갇혔다가 한양으로 압송, 포도청과 형조를 거쳐 의금부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801년 10월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다.

유중철 요한

유중철 요한 (양반), 1779~1801

순교지 : 전주 옥

‘종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철 요한은 1779년 전주 초남이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부친이고, 이순이 루갈다는 아내이며, 유문석 요한은 동생이다. 유중철 요한은 동정 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루갈다와 함께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밤낮으로 목에 칼을 쓰고 있어야만 하였으며, 옥중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키다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요한이 순교한 뒤 아내 루갈다는 그의 옷 안에서 편지를 발견하였는데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유문석 요한

유문석 요한 (양반), 1784~1801

순교지 : 전주 옥

유문석 요한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부친이고, 유중철 요한은 형이며, 이순이 루갈다는 형수가 된다. 유문석은 부친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앙 안에서 자랐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였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했을 때 유문석의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1801년 박해 때, 초남에서는 부친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됐고, 이어 형 유중철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다행히 체포되지 않은 유문석은 여름 내내 전주 옥사를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9월 중순쯤 유문석도 남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옥에 갇히고, 형 유중철과 함께 11월 14일에 교수형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고 미혼이었다.

유중성 마태오

유중성 마태오 (양반), ~1802

순교지 : 숲정이

‘완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성은 전라도 전주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주 어렸을 때 부친이 사망한 후 전주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랐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은 사촌 형제들이다. 작은 아버지 유항검과 그 가족들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유중성은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해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1802년 1월 사촌형수 이순이 등 친척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가량이었고 미혼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주교는 집안에서 전해오던 신앙입니다. 유항검 등 삼촌들이 영광스럽게 죽었으므로 그들과 같이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순이 루갈다

이순이 루갈다 (양반), 1782~1802

순교지 : 숲정이

‘유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순이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경도 가롤로와 이경언 바오로는 그녀와 남매간이고, 유중철 요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루갈다는 혼인 후 남편의 고향 전주 초남이로 가서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이후 남편 요한과 함께 동정 서약에 대한 유혹이 올 때마다 서로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루갈다는 그해 9월 중순경에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전주로 끌려간 그녀는 함께 갇혀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며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권면하였다. 루갈다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매를 맞고 옥에 갇힌 후 1802년 1월 친척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으며,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이경언 바오로

이경언 바오로 (양반), 1792~1827

순교지 : 전주 옥

이경언 바오로는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9살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형 이경도 가롤로와 누나 이순이 루갈다가 순교하면서 집안에서조차 버림을 받은 그는 과부인 어머니와 형수를 책임지며 궁핍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궁핍한 삶이 그의 신앙을 꺾지는 못했다. 교회서적들을 베끼고 상본을 그려서 팔아 얻은 적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새로운 신부를 영입하려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명도회의 일원으로서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지도자의 역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잘 알려진 지도자여서 1827년 전라도에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체포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그는 이것을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는데, 누나 이순이가 전주 옥에 갇혀 있다가 순교하였고 자신도 그 뒤를 따를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받은 고문으로 1827년 6월 35세의 나이로 옥에서 순교했다.

이일언 욥

이일언 욥, 1767~1839

순교지 : 전주 장터

이일언은 아버지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경상도 안의(현 경남 함양군 안의면)로 유배됐다. 이곳에서 그는 관장의 눈 밖에 나서 다시 옥에 갇혔고, 물도 얻어먹지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 키가 작고 몸집도 보잘것없었지만 믿음의 인내로 모진 형벌을 꿋꿋이 참아 받았다. 이후 갇혀 있는 10년 동안 그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견뎌내면서 참다운 신자로서 모범을 보였다. 이후 관장 허락으로 개인 집에서 연금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안의로 찾아온 아내와 함께 생활했다. 1826년 5월에는 연금에서 풀려나 전라도 임실 대판이라는 곳으로 옮겨가 살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다. 이듬해 정해박해가 일어나 전주 포졸들에게 붙잡힌 그는 모진 형벌에도 꿈쩍하지 않아 천주교인들의 두목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후 김대권 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 전주 옥에서 생활하던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72세의 나이로 전주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신태보 베드로

신태보 베드로 (양반), ~1839년

순교지 : 전주 장터

신태보 베드로는 경기도 용인 근처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을 알 수 없지만 훗날의 행적을 미루어 볼 때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학습을 습득한 듯 보인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가 며느리다. 1801년 신유박해가 끝난 후 용인 순교자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해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살다 다른 교우들과 연락해 교회 재건 운동을 시작했다. 성직자 영입을 위한 경비조달에 힘을 쏟았던 그는 일이 잘 되지 않자 경상도 상주 잣골에 정착해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교회 서적을 필사해 나눠주곤 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후 그는 포졸들에게 붙잡혔고,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교우들을 밀고하지도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그는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39년 5월 전주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 쯤 되었다.

이태권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양인), 1782~1839

순교지 : 숲정이

이태권 베드로는 충청도 홍성 양인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라도로 유배되어 사망한 이무명이 아버지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 바오로는 삼촌이다. 이태권은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아버지와 삼촌, 형과 함께 체포됐다가 석방됐다. 그 이듬해에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됐다가 석방됐다. 이처럼 그는 마음이 심약했으나 석방된 후에는 신자 본분을 계속 지켜나갔다. 교회 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눠주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가족과 함께 전라도 지역으로 이주해 살던 그는 1827년 박해 때 다시 체포됐다.
전주로 압송된 그는 첫 번째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다시 약해져 "교회 서적을 바치고 교우들이 있는 곳을 말하겠다"고 대답했으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이후에는 혹독한 형벌에도 끝까지 신앙을 굳게 지켰다. 김대권, 이일언 등과 함께 12년 동안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 1839년 5월, 57세 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정태봉 바오로

정태봉 바오로 (양인), 1796~1839

순교지 : 숲정이

어려서 부모를 잃고 5촌 당숙 손에서 자란 정태봉은 자립할 수 있을 나이가 되자 전라도 용담 고을(현 전북 진안군 용담면)로 옮겨가 살았다. 그때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항상 본분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교회 서적을 펴면 끝까지 읽은 다음에야 덮을 정도로 교리를 배우려는 열망이 강했다. 1799년쯤 덕산에서 순교한 정산필 베드로 회장이 사촌 형이다.
1827년 정해박해 때 밀고자에 의해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킨 정태봉에게도 약함은 바로 가족들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당숙의 손에서 자랐기에 가족들로 인해 마음이 약해질까 하여 아내와 아이들이 형장에 오지 못하도록 옥졸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이일언, 김대권 등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 전주 옥에서 갇혀 지내다 참수형으로 43세 때 순교했다.

김대권 베드로

김대권 베드로 (양인), ~1839

순교지 : 전주 장터

김대권 베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교리를 배워 왔으나, 열심히 수계하기 시작한 것은 부모가 사망한 뒤부터였다. 한때 베드로는 충청도 공주의 옹기점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이 무렵에는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아내를 구하는 꿈을 꾼 후,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내와 화합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게 되었다.
이후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된 그는 교우들에게 피신을 권유하면서도 자신은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종용히 기다렸다.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그는 웃는 얼굴로 그들 앞에 나아가 순순히 고산 관아로 끌려갔다.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 전주 옥에서 지냈으며,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전주 장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양인), 1789~1839

순교지:전주 옥

김조이 아나스타시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이성삼 바오로와 혼인하였다. 본래 원만한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남편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이후로는 더욱 더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언제나 교리를 실천하는데 열심이었으며, 자녀들의 교리 교육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그녀의 가정은 모두가 열심한 신자로 성가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에 도착한 뒤 그녀는 여러 차례 신문을 당하였으나, 어떠한 위협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인해 전주 옥에서 순교했다.

심조이 바르바라

심조이 바르바라 (양반), 1813~1839년

순교지 : 전주 옥

심조이 바르바라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무렵에 홍봉주 토마스와 결혼하였다. 그의 시조부는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 루가이며, 그녀와 같이 체포되어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그의 시아버지였다. 남편 토마스도 1866년에 순교하였다.
바르바라는 지능이 아주 낮아 아무리 노력을 해도 중요한 교리 외에는 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은 말할 수 없이 굳었으며, 자선심 또한 열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심조이 바르바라는 시아버지를 비롯하여 함께 살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한 뒤 옥에 갇히게 되었다.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고통으로 이질까지 걸려 마침내 옥사했다. 그녀의 나이는 27세였다.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양인), 1827~1839

순교지 : 전주 옥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1827년 이성삼 바오로와 김조이 아나스타시아의 딸이다.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훌륭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게 된 아나스타시아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분을 지킬 줄 알고, 천주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도 알았다. 그녀는 10살 때에 교리문답과 아침․저녁 기도를 배웠다. 선교사는 그녀의 나이가 비록 어렸지만, 그 마음에 감동하여 성체를 모시는 것을 허락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어머니와 함께 홍재영 프로타시아의 집으로 피신해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포졸과 옥리들은 이봉금 아나스타시아의 나이가 어린데다가 얌전하였으므로 동정심을 발휘하여 목숨을 건지라고 간청하였으나,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장은 형리들을 시켜 한밤중에 옥에서 교수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2세를 넘지 못하였다.

홍재영 프로타시오

홍재영 프로타시오 (양반), 1780~1840

순교지 : 숲정이

홍낙민 루가를 시작으로 홍재영 프로타시오, 홍봉주 토마스와 심조이 바르바라 부부, 홍봉주의 아들까지 4대가 순교한 집안이다. 이 가운데 기해박해 당시 전주에서 순교한 이는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인 홍재영이다. 홍낙민의 셋째 아들로 부모 입교 당시에 함께 입교했다. 성장한 뒤 동료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고 교회활동에 참여했던 그는 신유박해 때 체포됐으나 배교 뒤 전라도 광주로 유배됐다. 하지만 유배지에서 한동안 냉담한 뒤 다시 신앙을 되찾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어떤 때는 너무나 오랫동안 꿇어앉아 기도를 하여 걷기 어려울 정도가 된 적도 있었다. 38년을 유배지에서 살고 기해박해가 일어난 이듬해인 1840년 60세의 나이로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최조이 바르바라

최조이 바르바라 (양반), 1790~1840

순교지 : 숲정이

최조이는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된 그녀는 부친이 순교한 뒤, 비참한 생활을 하였으나 천주님이나 이웃에 대한 열렬한 애덕과 인내는 모든 사람들을 탄복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신태보 베드로의 아들과 결혼하였지만 얼마 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다. 1827년 정해박해 때 시아버지와 같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친척이나 친구들의 집에 얹혀살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시아버지와 다른 죄수들에게 도움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녀는 문초하던 감사에게 "죽음은 제가 바라던 것이고, 오래전부터 저는 그 준비를 해오고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1840년 50세 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이조이 막달레나

이조이 막달레나 (과부), 1808~1840

순교지 : 숲정이

이조이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19세 때 자식 없이 과부가 되었다. 막달레나는 오로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시부모에 대한 효도에만 전력을 다하였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는 천주님께서 비교적 덕을 닦기 쉬운 처지에 두어 주신 것을 자주 감사하였다. 비록 가난하였지만 자발적으로 대재와 소재를 지키면서 극기를 실천하였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힘썼고, 무엇보다도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는 귀찮은 일을 기꺼이 맡았다. 그녀는 함께 있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무엇보다 천주님과 더불어 솔직하게 행동합시다. 그분께 충실하여 모두 함께 천국에 올라갑시다. 하나도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오종례 야고보

오종례 야고보 (양반), 1821~1840

순교지 : 숲정이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장성하여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결혼 직후 전라도 고산에서 살았는데, 진산에 살고 있던 형을 찾아갔다가 1839년 7월에 체포되었다. 전주로 끌려간 야고보는 관장 앞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을 때 아직 젊은 나이이니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하면 놓아주겠다고 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주를 섬기는 행복을 알고 있는데, 어찌 형벌이 두려워 천주를 배반하겠습니까?" 야고보는 여러 차례에 걸쳐 갖가지 형벌을 받았으나 이를 꿋꿋하게 참아낸 다음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는 그가 오래전부터 원하던 일이었으나 형이 배교하는 것을 보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19세의 나이로 1840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