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의 작은 교회 공소를 찾아서(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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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1-11-11 조회 1,408회본문
마을 이름이 참 정겹고 어여쁘다. 풋풋한 설레임과 기대감을 안고 마을 길로 들어선다. 저만치 담장 위의 능소화가 골목을 향해 소담스럽게 피어있다. 화려한 꽃들에 시선을 빼앗긴 채 무심결에 안을 바라보니 활짝 핀 베롱나무 옆의 성모상이 순례객을 맞이한다.
농촌 마을 한가운데 세워진 옥단공소(신태인성당 관할. 주임=장상호 신부)는 주변의 주택들과 이질감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게 매력이다. 이곳은 1925년경에 김봉석(베드로, 초대 공소회장)형제가 회문산에서 가족을 데리고 옥단 마을로 내려와 살면서 신앙의 씨앗이 뿌려져 공소를 이루게 되었다. 이 마을은 전통적으로 유교의 관습을 지키는 곳이라 전교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김 베드로 형제의 끈질긴 노력으로 공소의 터전이 이루어졌다. 그는 수류성당에서 온 전교사와 함께 옥단에 살고 있던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전교를 하였다.
초기에 그는 신자들과 14km 떨어진 수류성당까지 걸어가서 대축일 미사에 참여했고 주일에는 진흥공소(옥단공소에서 4.1km)에 가서 공소예절을 하였다. 그 후 신자 수가 증가하자 진흥공소에 가지 않고 김 베드로 형제의 집에서 공소 예절을 하였다. 1954년 5월 신태인성당 관할이 되었으며 판공 때는 본당 신부가 옥단에 와서 판공성사를 줌으로써 공소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교우 세대수는 5세대 정도였다. 1960년에 들어서자 교우 세대수가 10여 세대로 늘게 되었다.
1985년 1월 공소 신자들은 공소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자금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제18대 주임으로 범영배(라파엘) 신부가 부임하면서 공소 건물 신축이 본격화 되었다. 공소부지는 장덕수(베네딕토, 前공소회장)형제가 고가古家 두 채를 매입하여 봉헌하였다. 1987년 4월 기초공사를 하면서 고가 두 채를 허물고 400평 대지에 건평 53평의 건물을 신축하였다. 공소 건물을 신축할 때 신태인본당에서는 주일 미사 중에 2차 헌금을 몇 차례 거두었고, 공소 신자들은 가구 마다 쌀 1~6가마까지 형편에 따라 봉헌하였다. 그 외에도 옥신가톨릭농민회, 본당 명도회, 익명의 신자들이 백미 외에 마루 판자 등을 기증하였다. 1,500만원의 공사비로 1989년 11월에 공소 건물이 완공되었으며 제6대 전주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가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2001년 12월 단원 9명으로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하늘의 문’이 창단, 75년이 넘도록 전교가 되지 않았던 곳이기에 옥단 쁘레시디움 창설은 그 의미가 대단히 컸다.
1970년 후반의 옥단마을은 130여 세대가 거주했던 대촌이었으나 이농으로 현재는 50여 세대가 살고 있다. 공소미사는 매월 셋째 주 금요일에 봉헌되며 교우 세대는 12세대이며 미사 참여 수는 10여명이다.
42년의 서울생활을 접고 6년 전 옥단마을로 귀농을 한 김태숙(로사, 구역반장)자매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20년 전부터 전원생활을 계획하였다. 이곳에 마음을 붙이고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과 따뜻한 사랑을 준 교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공소 마당을 쓸고 화단 정리를 하며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김옥순(안나, 現공소회장) 자매는 “시아버지께서 지금의 공소 부지를 희사하셨다. 연로하신 아버님 대신 공소 건립은 자연스레 우리 부부의 몫이 되어 앞장서서 힘을 보탰다. 1년 농사인 고추를 수확해 놓고 판매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힘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각난다.”며 “남은 봉사기간 동안 공소를 잘 관리하여 후대에 물려줘야 하는데 몸이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는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공소의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신앙과 삶이 함께 어우러져 기쁨 충만한 신앙공동체로 거듭나길 기원해본다.
취재 : 김도숙 율리엣다(교구 기자단), 사진 : 원금식 대건안드레아(교구 가톨릭사진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