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의 작은 교회 공소를 찾아서(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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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2-06-08 조회 1,406회본문
신풍성당(주임=전우진 신부)은 매월 넷째 주 관할 공소인 백자, 신암, 용지 세 곳의 공소 신자들과 본당 신자들이 한데 모여서 본당 공동체의 날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그 중 신암공소는 전북 김제시 용지면 신암길 77-4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61년 12월 31일 한센인들이 익산시 왕궁면 소재 국립익산병원(구 익산소생원)에서 신암마을과 용수리 비룡마을에 분리 이주 정착하여 자립의 터전을 마련했다.
1962년 3월 김제 요촌성당 故 범석규(마티아) 신부의 승인을 얻어 이남열(도밍고)과 임종욱(발라바), 장예복(필로메로)등 3명이 주축이 되어 공소를 설립, 15평의 토담집에 가마니를 깔고 예비신자 10여 명이 교리를 익혔다. 1963년 봄, 교우들이 장만한 부지에 흙벽돌을 찍어 초가 40평의 공소를 지었으며, 1966년에는 백자, 만경 공소 구 강당의 철거자재와 손수 찍은 시멘트 블록으로 함석지붕의 50평짜리 공소 건물이 완성됐다. 은인들의 도움과 공소의 논 매각 대금, 신자들의 성금으로 기존 공소 건물을 철거하고 60평 규모의 현대식 성전을 신축하여 전주교구 제6대 교구장 박정일 주교의 주례로 1983년 11월 13일 봉헌식을 거행했다. 부속 건물로는 수녀원(1985년)과 교육관(1989년)을 갖추고 있다.
1986년 장영자(크리스티나)수녀, 정순이(골롬바)수녀(성모영보수녀회)가 부임하여 공소의 신앙생활과 주일학교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故 양병호(레온시오, 제2대 공소회장)형제가 작성한 현황 기록표에는 공소 설립 이후 영세자 194명, 견진자 98명으로 확장되었지만, 1세대 한센인들이 선종하고 그 후손들이 도심으로 이주하면서 지금은 십여 명의 신자들이 신앙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신암공소에서 배출된 김옥주(프란치스코), 김평안(마르코)성직수사(살레시오수도회)와 이상훈 수사(가시미로, 사랑의선교수사회)는 공소 신자들에게 긍지와 희망, 용기를 갖게 해 준 자랑거리이다.
신암공소에서 60년을 거주한 박귀섭(안드레아) 형제는 제11대 공소회장으로 2009년부터 지금까지 마을대표도 겸임하고 있다. “개신교 교세가 워낙 강한 곳이어서 초창기에는 장로들과 갈등이 많았고 품앗이도 같은 신자끼리만 할 정도였다. 지금은 서로를 존중하며 살고 있다.” 박 안드레아 형제는 외지로 나간 자녀 세대들이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는 것과 공소 식구들이 자꾸만 줄어서 신앙 공동체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씀하신다.
공소는 7, 8년 전 태풍으로 인해 도로 바깥쪽으로 날아간 성당 지붕 수리와 작년에 실시한 페인트칠 공사도 신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비용을 마련하였고, 현재 성당 안으로 비가 새고 있어서 방수공사도 시급한 상황이다.
지난 3월 20일(주일) 신풍성당의 전우진(안토니오) 신부가 판공성사를 집행하고 15명 가량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사를 집전하였다.
전 신부는 강론에서 “공소 식구들이 서로 우애있게 지내고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신암공소에 대한 바람을 밝혔다. 신암공소는 현재 13가정, 17명 정도가 공소예절과 매월 셋째 주 오후 2시 공소미사와 넷째 주 신풍성당 교중미사에 출석하며, 성모회(회장=정순임 마리안나)회원 13명이 청소와 풀매기 등 공소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故 양병호(레온시오)형제가 1997년 7월 2일 작성한 신암공소의 연혁과 역사, 현황을 기록한 문건은 공소뿐만 아니라 전주교구의 역사에서 기억될 소중한 한 페이지가 될 것이다.
취재 | 이미원 미카엘라(교구 기자단), 사진 | 최경호 요수아(교구 가톨릭사진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