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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의 작은 교회 공소를 찾아서(30)

장수성당 관할 수분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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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1-10-10 조회 1,6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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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눈이 어두운 누구라도 수분공소 찾아오는 길은 걱정할 것이 없다. 장수군 장수읍 수분마을에 가까워지면 멀리 보이는 예수성심상이 우뚝 서서 먼저 방문객들을 반기기 때문이다. 수분마을엔 금강의 발원지인 뜸봉샘 생태공원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다. 이들 중 천주교 신자라면 사방에서 보이는 예수성심상에 이끌려 자연스레 수분공소를 찾게 된다. 수분공소 내 방명록에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을 찾아왔다가 수분공소의 예수님을 만나 순례객이 된 신자들의 이름과 기도가 빼곡이 적혀있다.

수분공소(장수성당관할, 주임=방의성 신부)의 역사는 1866년 병인박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춘경 교우가 살았다는 기록과 병인박해 후에는 전국에서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40~1850년대 최양업(토마스), 다블뤼 두 신부가 공소를 설치하고 사목을 했다는 전주교구사의 기록은 수분공소의 역사가 한국초대교회사에 한 획을 그었음을 알려준다. 1914년경 함양성당의 이상화(발도로메오)신부와 진안 어은동 성당의 김양홍(스테파노) 신부가 전교를 위해 두 성당의 중간지점인 이곳에 사제관과 강당을 지으면서 공소건물이 시작되었고 1918년에 수분리공소 축복식을 가졌다. 1921년엔 대대적인 공소건물 개보수를 하였는데 기와는 70여 리 떨어진 함양에서 등짐으로 져 나르고 재목은 15km 떨어진 번암면 금천리에서 어깨에 메고 옮겼다는 기록은 신자들의 일심동체 신앙을 엿보게 한다. 당시 공소회장인 김한서(니고나오)와 박재은(스테파노) 형제가 공소재건에 특히 힘을 쏟았다.

수분공소는 1926년에 수분리성당으로 정식본당이 되었고 교세가 한창이던 1935년경에는 교우수가 1300여 명(공소1000, 본당300)에 이르렀다. 6.25전쟁 후 사제공석이 되면서 남원본당 관할공소가 되었고 1954년엔 장계성당 관할공소, 1977년 장수성당 관할공소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창기 한옥성당 양식인 수분리성당 건물은 근대문화유산 보호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에 국가등록문화재 189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12년 수분공소 문화재 보수공사를 거쳐 2013, 수분공소 축복식을 가졌다. 공소건물 안에 들어서면 오른쪽 앞 벽면에 1987년 박정일 주교로부터 받은 수분공소가 자치교구 설정 50주년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내용의 표창장이 수분공소가 지나온 신앙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공소회장 김기순(안드레아)형제는 결혼 후 잠시 고향을 떠나 살았지만 2012년 공소회장을 맡아 지금은 공소를 찾는 이들의 순례를 돕는 지킴이 역할을 단단이 하고 있다. 1928년 석종관(바오로) 신부가 문맹퇴치를 위해 세웠던 소화학원의 학교자리는 이제는 김 회장이 가꾸는 꽃밭이 되었다. 올망졸망한 꽃들로 화사한 꽃밭이 당시 바글바글했다는 학교 어린이들과 신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올 초 투병을 위해 귀향한 이순금(아셀라) 자매는 어린 시절 친구들의 교리공부와 기도소리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당시 깜깜한 밤길에 관솔에 불을 당겨가며 성당을 오가던 친구들이 십자가가 나쁜 재앙을 없앤다고 했던 이야기들이 인생중반을 넘기면서 세례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매달리자라는 결심으로 이어지게 했다.

공소 마당 높이 서서 공소 위치를 알려주는 예수성심상 아래에는 성모상이, 그 옆으로는 십자고상이 당재를 뒤로 하고 우뚝 서 있다. 공소마루 천장에는 자그마한 종이 정겹게 걸려있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줄을 당겨 종을 쳐 볼 수 있는 자리다. 삼종기도와 미사시간을 알리며 오랜 시간 신자들의 신앙을 깨웠을 종.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무엇이 종소리의 역할을 하는지 수분공소는 그렇게 물어보고 있었다.

 

 

공소미사 : 매월 첫째 주일 오전 730

 

취재 : 오안라 안나(교구 기자단), 사진 : 김창식 베드로(교구 가톨릭사진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