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복음화의 밀알이 된 ‘땀의 증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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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1-03-04 조회 1,696회본문
올해는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이자 첫 신학생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 탄생 2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최 신부는 ‘땀의 증거자’, ‘길 위의 사제’라 불리며 조선 복음화에 헌신한 한국 천주교회의 큰 별이다. 최 신부는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하여 사목하는 동안 매년 7천 리를 걸으며 복음을 전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127개 교우촌을 쉼 없이 순방하는 강행군이었다. “신자들은 항상 성사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애만 태웁니다. 언제나 천상양식에 굶주린 영혼들을 실컷 배불리 먹일 수 있겠습니까?”라며 사목자로서의 안타까운 마음을 서한에 적고 있다. 오직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 살아온 사제의 굵고 짧은 한 생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충남 청양군 다락골에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복자 이성례(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난 최양업 신부. 그는 15세 때 프랑스 선교사 모방 베드로 신부에 의해 첫 한국인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동료인 김대건, 최방제와 마카오 유학길에 오른 최 신부는 1844년, 김대건 신학생과 함께 페레올 주교(조선 3대 교구장)로부터 부제수품을 받았다. 조선 입국을 꿈꾸던 그는 1847년 7월, 조선에 파견되는 프랑스 함대의 통역 담당으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첫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풍랑을 만나 고군산 군도(古群山 群島)인근에서 좌초되었다.
8월 12일, 일행은 군산시 신시도에 상륙하여 30여 일간 체류하게 된다. 최 신부는 이곳에서 신자들과 접촉을 시도하며 조선입국을 꿈꿨지만 이루지 못하고 상해로 되돌아갔다. 이처럼 신시도는 최 신부가 유학 후 부제가 되어 처음 고국 땅을 밟았던 의미 있는 장소이다.
전주교구는 최양업 신부를 이곳 군산으로 보내신 주님의 뜻을 새기고 군산지역 신앙문화유산을 기념하고자, 2013년 11월 30일 신시도 난파 체류지에 작은 표석을 설치하였다. 새만금 신시도 현장에 자리한 표석은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 귀국을 꿈꿨던 최양업 신부의 흔적을 아련히 상기시킨다.
1849년 4월, 최 신부는 상해 강남대목구장 마레스카주교로 부터 사제서품을 받는다. 이로써 두 번째 한국인 사제가 탄생, 1849년 12월에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귀국한다. 최 신부가 마카오로 유학한 지 13년 만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교우촌 순방에 들어갔다. 교우들을 만나 성사를 집전하던 최 신부는 우리말 교리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천주가사」를 편찬했다. 또한 한문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과 기도서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신학생을 선발하여 페낭신학교에 보내고 선교사들의 입국 주선,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과 자료 수집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한 달에 나흘 정도만 숙면을 취했던 최 신부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1861년 6월, 경북 문경 인근에서 쓰러져 선종하였다. 그의 나이 만 40세, 조선에 들어와 사목한 지 11년 6개월 만이었다. 현재 최 신부는 충북 제천 배론성지에 안장돼 있다. 2016년 4월에 교황청 시성성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된 최양업 신부는 한국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시복시성 대상자 중 증거자로는 첫 가경자가 되었다.
가경자(可敬者, Venerable)는 존엄한 자, 존경스러운 분이라는 의미의 호칭이다. 피를 흘리는 순교를 하지는 않았지만 온몸으로 신앙을 증거한 ‘백색 순교자’ 최 신부가 하루 빨리 시복이 이뤄지도록 신자들의 관심과 기도가 요구되고 있다.
조선 선교를 위해 하나의 밀알이 된 ‘길 위의 사제’, 그 밀알 하나가 죽어서 맺은 열매들이 오늘날 찬란한 복음의 꽃을 피우고 있다.
|취재 : 신현숙(교구 기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