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의 작은교회 공소를 찾아서(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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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7-09 조회 2,357회본문
신풍성당(주임=김영복 신부) 관할 백자공소는 1899년 경 유군심(요셉) 일가족이 익산군 함라에 살다 박해를 피해 이주하여 생업으로 옹기그릇을 구웠고, 신자들이 모여들어 신앙촌으로 발전했다. 유회장은 마을 한복판에 30여 평의 목조건물을 신축하여 회장직을 맡아 공소 예절을 시작하면서 1909년 전동성당 백자공소가 설립되었다.
그 후 유 요셉 회장의 손자인 유석종(스테파노) 형제는 공소가 마을 한복판에 있어서 합당한 예절을 드리기 어려워 현재 경당 부지인 379평을 희사하였다. 당시 김제성당(현 요촌성당)주임 범석규(마티아)신부가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신자들은 철판으로 판을 만들어 직접 벽돌을 찍어서 30평 벽돌집을 지어 1963년 한공열 베드로 주교의 집전으로 공소 강당 봉헌식을 거행했다. 당시 신자 수는 180명 정도였다.
김준철(라우렌시오, 9대 공소회장)형제는“18세 때에 전주에서 학업을 하다가 집 안 형편이 어려워 돌아와서 두문분출하던 중 밤늦게 공소에서 기도를 하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져 신앙에 대한 갈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낮의 고된 노동으로 몸이 지쳤는데도 해가 지면 공소에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 만과하고 성가 부르고 교리 가르칠 생각에 힘이 넘쳤다. 그러다 보니까 조선천주교리(朝鮮天主敎理)도 옥편을 찾아 읽으며 공부했다. 그래서 김제성당에서 교리 대회가 있으면 백자 공소가 일등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어른들이 공소 일을 맡겼는데 그때가 20살이었다. 공소 회장을 하면서 작성한 백자공소 교적과 공소 회장의 문서와 장부는 신부님이 판공성사 때 오시면 제일 먼저 확인했다. 1985년 신풍성당이 신설되면서 백자 공소는 김제 성당(현 요촌성당)에서 신풍성당 관활로 이관되었다. 신풍성당 초대 주임 강인찬(도미니코)신부는 공소 신자들의 요청으로 공소에서 한 달에 한 번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했다.
강승우(빈첸시오, 현 공소회장) 형제는손으로 벽돌을 찍은 공소가 세월이 흐르면서 신축의 필요성이 필요해져 공소 예절 봉헌금으로 적금을 들어 신축에 필요한 종잣돈을 마련하고, 2007년 건축위원회를 구성, 공소 건물을 철거하여 원래 위치에 새 공소의 신축을 시작하였다.
2003년 구성된 성모회는 20여 명의 회원이 2인 1조로 식사와 새참을 준비하였는데, “옛날에는 신부님이 판공성사를 주시기 위해 오시면 공소에서 주무시니까 생 솔가지를 꺾어서 아궁이에 불 때면서 울면서 밥 했는데,
공소 지을 때는 가스불로 밥해서 힘든지도 모르고 했다.”고 정영희(엘리사벳)자매는 말했다. 또한 공소 신자들도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단순한 일은 직접 공사에 참여했고 신풍성당 사제와 신자들도 4천만 원을 지원해주었으며, 또한 은인들의 도움으로 156.43㎡ 크기 2층 적벽돌 패널 건물을 2008년 3월 완공하였다.
백자공소는 하늘을 상징하는 청기와로 지붕을 이고, 내부 천정은 지구를 상징하도록 둥글게 하였으며, 종탑은 육각으로 마무리하였다. 현재 제대는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원형을 복원하여 사용 중이고 십자가의 길 성화도 액자만 바꿔서 사용 중이다.
2008년 7월 축성식 때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는 “저 벽돌 한 장 한 장에 얼마나 많은 상추가 들어갔을까! 상추를 가꾸는데 얼마나 많은 손이 가는데, 땀 흘려 가꾸어 봉헌한 정성으로 지어져 실로 감동적입니다.”라며 공소 신자의 노고를 치하했다고 한다.(쌍백합 22호 ‘그때 그시절’ 참조)
유서 깊은 신앙을 갖고 있는 교우촌 백자공소는 일대 마을 주민 50여 가구 중 44세대 144명이 신자로 매주 첫째 주일 오후 2시에 미사가 봉헌되며 평균 40명 정도가 참석하고 있다.
취재 | 송병근 스테파노(교구 기자단), 사진 | 김창식 베드로, 원금식 대건안드레아(교구 가톨릭사진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