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의 작은 교회 공소를 찾아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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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8-10-10 조회 2,935회본문
공소 앞에서 회의하고 있는 교우들 모습(1985.1)
찔레꽃 세 번 필 때 모심고 베롱꽃 세 번 지면 쌀밥 먹는다는 옛말처럼, 시간을 읽는 법이 다른 분들이 하나 둘 공소에 모여드는 주일 아침이 한가롭다.
정읍시 내장산 자락, 입압저수지와 호남선 노령역 일원 등천공소는 1903년 수류성당에서 신성리성당(정읍 시기동성당의 전신)이 분리되었을 때만 해도 23개 공소 가운데 신자 수가 제일 많은 곳이었다.
1920년 미알롱 신부 재임 때, 공소 설치 허가를 받아 1924년 드망즈 주교 집전으로 경당이 축성되어 어언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등천공소는 안타깝게도 6.25 전란 중에 소실되어 1957년 10대 김영일 아우구스티노 신부 재임 때 18평 경당을 새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서정식 마르코 형제의 기억 속에는 모싯잎 무성한 불타버린 공터가 선하다.
15대 서용복 도마 신부의 당질이기도 한 그는 이후 경당을 믿음과 땀으로 가꾼 교우들에 대한 기억을 나눠 준다. 경당을 짓고 가꿀 때 주도적이었던 이만수 형제, 화단을 조성했던 유연화 막달레나와 자매들, 경당을 지키는 철재 종탑과 성모상을 나바위 성지에서 옮겨 온 이 곳 출신 범석규 마티아 신부도 그중 한 분이다. 그 성모상 주변을 투박하게 두른 돌무더기들을 보며, 매괴회 총무였던 정천순 가브리엘라 자매는 “지금도 찾아보면 어디 장부도 있을텐데 이제 생각도 잘 안 난다.”며 옛날을 애틋하게 그리워한다. 신앙 길잡이 역할을 하며 남성봉사단체 호산나회를 이끌었으나 지금은 고인이 된 박노복 마태오 형제, 뙤약볕 아래 수녀원을 건립한 사랑의 요십이 회원들까지 박해를 피해 숨어든 후손들과, 신앙터를 일궜던 교우들은 세월을 따라 떠나고 몇 분만을 새 얼굴들 속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김금자 세실리아 자매는 20년 전 조카의 소개로 서울에서 귀촌한 새 얼굴이다. 남편 전문규 야고보 형제와 함께 공소회장과 총무로 공소 살림을 맡으며 겪었던 얘기와 보관하고 있던 사진들로 지금과는 사뭇 다른 공소의 모습을 전해 주며 “역사는 오래되었으나 기록 같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라며 공소의 역사를 아쉬워한다.
2008년 수녀원을 짓고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님들도 감실 지킴이로 신자들에게 매주 성체를 영해 주는 든든한 새 식구가 되었으며,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이 곳에 정착하여 자신의 집을 피정 쉼터로 제공하기도 하면서 총무로 봉사하는 배금자 실비아 자매도 수년 전 공소의 새 식구가 되었다.
1년 전 은퇴 후 홀로 계시는 시어머니를 가까이 모시려 귀촌한 김윤숙 유스티나 자매는 “서울 본당에선 표도 안 났는데 여기선 작은 일에도 저의 존재가치가 커요(웃음). 평일에는 자연 속에서 묵상하고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 좋다.”며 전례 해설자로 봉사하고 있는 막내 귀촌 교우이다.
자신을 곁다리 신자라며, 요양차 내려왔다가 지금은 공소회장을 맡아 열심한 9년 차 배석주 요한 형제는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18평 공소를 채우는 교우들을 “신의 섭리로 밖에 말할 수 없어요. 또 앞으로 인근에 농공단지가 들어서면 공소 신자가 늘었으면 늘었지 줄진 않을 테니 이제 경당을 넓혀야 하는데 본당도 어려우니 걱정”이라고 말한다.
상량문에 새겨진 ‘천주 강생 일천구백오십육년’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 서러워 말지니 도리어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얻게 하소서’라는 W.워즈워스의 시처럼, 등천공소가 새로운 식구들로 새로운 신앙의 역사를 계속 이어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글 : 현화진 기자(교구 기자단) 사진 : 윤영, 이혜령, 원금식(교구 가톨릭사진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