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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2024년 제41회 자선 주일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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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11-27 14:47 조회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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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자선 주일 담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제41회 자선주일 포스터

+ 찬미 예수님

하느님을 사랑하시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1984년부터 시작하여 40년째 되는 ‘자선 주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특히, 사순절 동안 세 가지를 훈련합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자선은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서, 그리고 단식은 나 자신과의 관계를 위해서 필요한 영적 훈련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전하고 있는 이 훈련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해마다 우리는 재의 수요일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6,16).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입니다. 취업과 실업, 성공과 실패, 합격과 불합격 ……,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부부의 관계가 좋을 때 행복합니다. 자녀들과 관계가 나쁠 때 고통스럽습니다. 이웃과 관계가 나쁠 때 고독해집니다. 우리에게는 함께하고 싶은 이웃도 있고,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싫은 이웃도 있습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잘난 체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또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로마 2,8).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의 길을, 사악한 입을 미워한다”(잠언 8,13).

반대로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은 겸손하고, 자기 것을 기꺼이 베푸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베푸는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0.46). 우리는 모두 우리의 이웃들이 나를 좋아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웃들이 나를 싫어한다면, 아마도 내가 거만하거나 나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들이 나를 좋아한다면, 내 것을 기꺼이 그들과 나누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나의 재물뿐만 아니라 나의 재능, 나의 힘, 더 나아가 나의 마음입니다.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큰 시련을 겪는 이웃과 함께 슬퍼하고, 경사를 맞이한 이웃과 함께 기뻐하는 것도 자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힘없고, 약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도 함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세상의 행복은 제물의 풍요로움에 있지 않고 함께 나누는 이웃들과의 관계에 있음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희생은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놓는 일입니다.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입니다. 희생은 자선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3-4). 자신에게 소중하고 필요한 것마저 내어 주는 자선 또한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 소련의 영화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희생”이라는 영화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싶어 하였습니다. “남을 위하여, 혹은 어떤 일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에게서 최소한 경미한 정도로도 느끼지 않는 한, 그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중단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 같은 인간은 자신의 삶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로봇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 것이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이 세상이 살 만하다면 누군가의 희생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편리하게 살아가는 오늘은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피땀, 희생이 그 밑받침에 있습니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험악하고 불안하다면 누군가가 저지른 범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희생은 원죄를 씻어 냅니다. 자선은 평안과 기쁨을 가져옵니다. 베풂은 이기적인 이 세상을 구원하는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절대적 희망이십니다. 코로나도, 전쟁도, 자연재해도,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이 희망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적 희망이신 하느님과 함께, 그분에게서 비롯되는 작은 희망들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 자신의 것을 나눕시다. 그렇게 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시다.

2024년 12월 15일 자선 주일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조 규 만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