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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박해 현장을 가다 2)-‘기해박해’[가톨릭 신문 2002-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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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0-01-22 조회 1,958회

본문

 새남터 형장의 북소리는

오늘도 순례자의 마음 울리고…

포도청 옥터는 흔적도 없어

전라감영 옥터엔 나무만…

『이런…? 이런 정신나간 놈!』

숯을 입에 처넣겠다는 엄포를 놓고 부젓가락으로 시뻘건 불똥이 튀는 숯덩이를 집어들던 옥사장은 유대철(베드로)이 태연하게 입을 벌리자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에이, 독한 놈. 꿈에 볼까 두렵네』

흙을 털고 일어선 옥사장은 유대철을 뚫어지도록 쳐다보다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자리를 피했다. 「뭔가 잘못된 게야, 뭔가…」 옥사장의 머리에서는 이런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대철은 열셋이라는 어린 나이로는 상상도 못할 고문을 여러 차례 견뎌낸 터였다. 태형을 수백 대도 넘게 맞았고 곤장 가운데 가장 크다는 치도곤도 마흔대를 맞았으니 뼈가 부러지고 살이 헤어진 몸은 그야말로 피투성이었다. 또 다시 형리들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고 허벅지살을 뜯어내는 고문을 해댔다.

『이놈,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

『믿고 말고요. 그런다고 제가 천주님을 버릴 줄 아세요』

아무리 고문을 해대도 대철의 얼굴에서는 평화스런 표정이 스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철이 제 몸에 헤어져 매달려 있던 살점을 떼어내 관장 앞에 던지자 이를 지켜보던 관원들 사이에는 두려운 기색이 떠올랐다. 지난 여름, 역관이던 아버지 유진길이 잡히자 자청해 포도청을 찾은 후 이어지고 있는 고문은 이렇게 한철을 넘기고 있었다.

가을조차 한 고비를 넘기려는 10월 31일, 대철의 가련한 몸뚱이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옥사 안으로 검은 그림자가 쑥 들어왔다. 형리는 이내 대철의 목에 줄을 감아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아물아물해져 가는 대철의 눈앞에는 숱하게 그리던 나라가 다가오고 있었다. 줄에서 풀려난 그의 얼굴에서는 만족스런 웃음이 피어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4차례의 고문을 기적과도 같은 용기로 이겨낸 유대철은 한국이 낳은 성인 중 가장 어린 13살의 나이로 성인 반열에 들게 됐다.

1839년 4월 18일(음력 3월 5일)에 시작돼 11월 23일까지 이어진 기해박해는 유대철과 같은 순교자가 있어 4대 박해 중 가장 많은 70명의 성인을 낸 역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순교자들이 손수 써 남긴 기해년의 아픔과 영광이 함께 담긴 「기해일기」를 뒤적이며 종로거리를 걸어본다. 기해박해로 전국에서 참형을 받고 하느님 나라에 동참한 70여명의 순교자, 이에 버금가는 60여명이 유대철 성인처럼 옥중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아야 했다는 부분에 생각이 미치자 더욱 쓸쓸함이 다가왔다.

단성사 근처에 있었을 좌포도청과 동아일보 사옥 어디쯤의 우포도청을 끼고 있는 종로거리는 그 어디에서도 과거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다. 기해박해를 통해서만 8명의 성인을 내고 종교의 자유를 얻을 때까지 모두 15명의 성인을 낸 「포도청 옥」은 기억해야 할 순교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를 돌아보지 못한 후손의 손길이 부끄러워졌다.

기해박해는 또 한곳을 순교자들의 성혈로 물들게 했으니 그 곳이 바로 「당고개성지」다. 설이 다가오자 서소문 밖에서 장사를 하던 장사꾼들이 대목장을 망칠까봐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해 형지가 아니었던 당고개에서 형을 집행했던 것이다.

기해박해 마지막 순교자가 난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옷가지는 물론 짚신도 신지 못한 10명의 천주교인들이 살을 에는 삭풍을 맞으며 당고개로 향했으니 이들이 성인품에 오른 박종원, 홍병주?영주 형제,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 이문우, 최영이 등 9명과 이성례(마리아)다. 망나니의 칼날에 당고개는 서소문 밖,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키며 성스런 땅으로 새로 난 것이다.

당고개를 거쳐 20여분 걸어 닿은 새남터,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군문효수형을 당하고부터 천주교인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이 곳에는 성당이 들어서 있어 모처럼 후손으로서 기를 펴게 한다.

9월 21일,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가 을씨년스러웠을 형장. 한국 땅을 최초로 밟은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는 이역만리 이곳에서 어떤 마음으로 죽음과 조우했을까. 효수 후 장대에 매달려 새남터를 내려다보았을 머리와 백사장에서 나뒹굴었을 시신, 지금도 효수를 알리는 북소리가 순례하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울리는 듯하다.

한국교회를 늘 새롭게 돌아보게 하는 전주를 향하는 발걸음은 가쁘다. 전주 서문 밖 「숲정이」는 5월 29일 김대권(베드로) 등 5명이 참수당함으로써 거룩한 땅이 됐다. 박해가 본격화되며 2차 처형으로 10월 12일 전라감영에서 신요한을 비롯한 5명이 장사(杖死)한데 이어 「척사윤음」 반포로 박해가 일단락된 후에도 제3차 처형이 있었으니, 달레가 「조선 성교회를 위로한 가장 빛나는 순교」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홍재영과 일행이 1840년 1월 4일 기꺼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았다. 또 11살이라는 세계 순교사상 최연소로 순교의 영광을 안음으로써 다블뤼 주교가 성녀 아녜스에 비유하며 『이와 같은 옹호자를 진리에 바치는 민족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장래가 약속되는 것인가!』라고 극찬했던 이봉금(아나스타시아)이 숨져갔던 전주시 중앙동 전라감영 감옥터에는 지금은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회화나무만 남아 오가는 이들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다.

사진말 - 망나니의 칼날에 쓰러져간 순교자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새남터성당.

서상덕 기자 ( sang@catimes.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