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단상 3> 교리교육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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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 세실리아 작성일20-08-27 14:58 조회1,99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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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을 넘어 실제 경험을 쌓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도 몇몇 분야는 이론만큼이나 실기를 중시하며, 교리 교육 역시 그러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이루어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 2,14)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교리교육의 세 번째 주제인 그리스도인의 삶, 윤리는 우리의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도록 실천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이끌어 줍니다. 믿는 바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교리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요? 많은 분들은 이 분야의 가르침이 계명과 윤리 조항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제한하고 꾸짖는 내용이라 생각하겠지만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먼저 우리가 지닌 존엄성을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십시오.”라는 성 대 레오 교황의 말씀으로 교리서의 제3편은 시작합니다. 이는 윤리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단순히 규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품위를 살아내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이미 하느님의 삶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삶을 자유 의지로 기쁘게 받아들이며 선택합니다. 양심에 따라 덕을 쌓으며 서로를 위한 공동체,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세우기를 희망합니다. 따라서 이 윤리 안에서 죄를 얘기하는 것도 그 부족함에서 벗어나 본연의 품위를 되찾기 위함으로 봅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요한 12,47) 하신 말씀처럼 윤리는 다그치고 꾸짖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격려하고 삶을 기쁨으로 이끌어 냅니다.
윤리 교육을 얘기하며 저는 여러분들이 이점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윤리에 대한 거부감을 갖지 마시고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십시오. “우리는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1테살 5,5 참조).
이처럼 인간의 존엄성과 은총을 얘기한 다음에야 교리서는 십계명을 설명합니다. 이는 계명들이 우리에게 규제가 아닌 이끄심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따지며 자신의 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 계명들을 통하여 삶이 완성되기를 희망합니다. 복음에서 어떤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님의 응답을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따라서 계명이란 결국 우리가 온전히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교리서는 십계명도 이 두 사랑의 계명 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명들을 알고 지키는 것이 단순히 죄를 찾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완성하는 것으로 이끌고자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라는 계명에서는 주님의 날에 은총과 참된 휴식을 내 이웃들과 어떻게 함께 누릴 수 있을지를 얘기합니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라는 계명에서는 생명의 존중과 세상 안에서 평화의 문제까지 논하며 우리의 참여를 요구합니다. 이처럼 계명에 대한 가르침은 단순히 그것을 어기느냐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이 계명을 통하여 삶을 변화시키고 완성하는 데 있습니다.
유학 시절에 독일 마인츠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금속 활자를 만든 구텐베르크를 기억하는 박물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는 자랑스럽게도 우리 선조들의 발명이기에 저는 이 곳에서 이를 어떻게 다루는지 궁금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금속 활자의 첫 발명이 구텐베르크가 아닌 한국임을 분명히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들은 왜 세계에서 첫 발명도 아닌 것을 이렇게 자랑스러워하고 기념하는가? 제 의문에 그곳에 있는 사람은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우리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기념하는 것은 이 발명이 우리의 삶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 금속활자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글을 읽게 되고, 교육을 받게 되었으며, 과학이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발명은 유럽과 세계 전체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보다도 먼저 이를 발명하였음에도 왜 우리의 역사는 저렇게 바뀌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까닭은 교리를 배우는 것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 같이 자신의 삶과 세상을 새롭게 하는 데까지 이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리 교육을 통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알아가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증가만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이렇게 답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어떠한 변화를 이루었는지요. 혹시 복음서에 등장하는 어느 부자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예수님을 찾아오지만 자신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삶을 바꿀 수 없는 이 사람은 슬퍼하며 주님을 떠나갑니다(마르 1,17-22 참조).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결국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신앙은 삶의 변화를 통하여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안다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음을, 우리가 믿는다 하여도 실천하지 않으면 결국 죽은 믿음임을 기억합니다. 따라서 교리교육 역시 교리 지식이나 전례에서 멈추지 않고 그다음 주제인 윤리 영역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교리가 우리 삶에서 살아질 때,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덕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재작년 성덕의 소명에 관한 권고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 책의 이름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입니다. 교리를 배우는 것이, 그 교리를 실천하는 것이,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 모두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무쪼록 윤리와 계명들의 가르침을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끼시기보다 성덕의 기쁨으로 즐거이 만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