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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신학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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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 세실리아 작성일19-08-28 15:58 조회1,8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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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로 향한 시선은 몸을 열광케 한다. 혹은 몸의 열광을 스스로 바라며 포르노그래피에 시선을 던진다. 지나가는 이를 우연히 음욕을 품고 바라보거나, 시선을 특정 대상에 집중시키며 의식적으로 음욕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이런 행위는 인간 스스로가 마음속 깊이 갈망하는 행복에 과연 기여해 왔던 것일까. 마음으로 범하는 간음은 정말 진정한 가 열망하고 있는 것일까.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은 적당한 공생을 위한 사회적 타협의 산물일까. 성의 무한한 해방은 무한한 행복을 약속하는 것일까.

그러나 포르노그래피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이는 없다. 영원히 사랑할 만한 한 사람은 그곳에서 절대 발견되지 않는다. 성과 사랑이 쓸쓸히 해체되고, 그 개념과 의미가 난폭하게 조작될 뿐이다. 성은 육체의 극히 작은 일부분인 성기의 활동으로 축소된다. 사랑은 호르몬의 화학적 반응으로 전락한다. 여기서 순간의 쾌락을 탐하는 육체와 영원을 갈망하는 마음이 분열한다. 마침내 쾌락의 찰나를 옹호하기 위해 영원을 전략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른다. 영원한 생명, 하늘나라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케케묵은 신화에서 벗어난 계몽된 인간으로 자부한다. 이 시대에 남녀 관계는 해져야만 한다, 자신의 마음이 버리지 못하는 영원에 대한 미신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평생 한 사람과 산다는 것이 말이나 돼! 이 같은 똑똑한 머리는 마음의 심연으로부터 끝없이 흐르는 영원을 향한 욕망을 기꺼이 배반하고자 한다.

마음은 이성이 모르는 것을 안다.”(파스칼) 머리로 계산되지 않는 영원을 알고 있다. 머리가 모르는 그곳을 열망한다. 욕정으로 인해 몸··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도, 영원한 한 사람에 대한 기대를 멈추지 않는다. 죄의 시작보다 앞서 있는 원순수, 그 창조의 유산이 마음에 아직도 남아 있는 까닭이다. ‘한 처음의 말씀’, 창조의 목소리가 여전히 울리고 있는 마음. 그래서 마음은 사랑과 욕정이 싸우는 전쟁터가 되곤 한다.

완고한 마음의 눈을 깨끗이 닦고 심연에 여전히 살아 있는 창조 신비를 알아볼 것이 요청된다. 충동을 불온시하여 짓밟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순수한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생한 충동을 지니라는 것이다. 이 충동은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감탄하게 한다. 하지만 음욕을 품고 바라보게 하지는 않는다. 깨끗한 마음은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하게 한다. 그래서 행복하다(마태 5, 8 참조). 신체의 눈은 마음의 눈이 맑을 때 밝아진다.

욕정도 사랑도 바라봄으로써 시작된다. 무엇을 보는지 혹은 보고자 하는지에 따라 보는 이의 존재는 결정된다. 사람에게서 몸뚱어리만 보거나 보고자 하는 이는 한낱 몸뚱어리로 머물 뿐이다. 서로 착취하고 학살한다. 사람의 몸으로부터 인간을 보거나 보고자 하는 이는 참 인간이 되고자 한다. 성은 성으로써 충족되지 않는다. 쾌락은 쾌락을 구함으로써 만족되지 않는다. 사랑은 스스로 신이기를 멈출 때 비로소 악마이기를 그친다(드니 드 루쥬몽). 성 충동은 한 인격과의 만남을 향한 갈망의 표징이며 쾌락은 그와 친교를 이루었을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ex-stasis) 그를 향해 달려 나갈 때 사랑은 말 그대로 황홀경(ecstasy)에 이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못 박힌 에로스’(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를 날마다 바라본다. 그리스도의 몸에 이끌리고 그분의 마음에 동화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에로스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분이 보았던 것을 보고 그분을 보고 있는 분을 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