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신학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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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 세실리아 작성일19-07-11 13:04 조회1,59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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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있어서 충동과 감정은 ‘자기 증여를 통해’ 성취되는 한 인격과의 친교를 ‘다그치는’ 역할을 한다. 충동과 감정이 이 ‘의미’와 분열되어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숨기게 된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는다.”(창세 3, 7 참조)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은 여자와 그녀의 남편은 몸을 가린다. 알몸 상태가 ‘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열매를 먹어서 몸 자체가 악으로 변해 버린 것이 결코 아니다.
변한 것은 몸을 바라보고 읽어내는 시선과 마음이다. 원죄 이전에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창세 2, 25 참조)원순수 상태에서 몸이 투명하게 드러내고 마음이 알아보며 기뻐하던 ‘자기 증여’의 의미가 이제는 해체된다. 죄로 말미암아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고 몸의 의미를 임의로 조작해서 읽게 된다. 몸을 선물(경이)의 시선이 아니라 욕정(탐욕)의 그것으로 바라보기에 이른다. 몸과 성은 더 이상 인격이 계시되는 장소로 인정되지 않는다. 몸은 물질로 전락한다. 소유하고 착취하고 조작해도 되는 ‘물건’이 된다. 쾌락의 ‘대상’으로 변질된다.
성 행위의 목표도 더 이상 인격들 간의 친교가 아니다. 쾌락의 극대화 그 자체이다. 충동과 감정 또한 친교가 아니라 쾌락 자체만을 쫓는 표지로 읽힌다. 내 몸이 말하는 언어는 나를 선사해야 할 사랑이 아니라 내가 쟁취해야 할 쾌락으로 오역(誤譯)된다. ‘본래’ 성의 쾌락은 친교 행위가 동반하는 ‘선물’이었다. 이제는 쾌락이 기획된 생산품 혹은 의식적인 강요로서 등장한다. 성 행위 안에서 ‘너·영원·사랑하다’가 퇴출되고, ‘나·순간의 반복·지배(점령)하다’가 판을 치게 된다.
왜곡된 시선과 어두워진 마음을 지닌 사람이 ‘알아 본’ 자신의 알몸은 삼위이신 하느님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함 혹은 그것을 거부함을 스스로 공표하는 것이 된다. 남녀가 서로 몸으로 다르다는 점이 분명하게 말해 주던 하느님의 모상성은 희화화된다. 몸과 성이 하느님과 맺고 있던 본래적 의미의 상실이 가져 온 ‘수치심’으로 인해 몸을 가린다. 하느님과는 무관하게 보이는 즉 근원적·신학적 ‘의미’가 상실·결핍된 듯이 보이는 몸을 은폐하기에 이른다. 죄로 물든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고 하듯이 제 알몸을 숨기려고 한다.
알몸 가리기의 보다 본질적이고 긍정적인 뜻은 몸에 원래 드러나 있는 인격을 무시하는 난폭한 욕정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데에 있다. 몸으로 계시되는 인격을 물화(物化)시키려는 폭력적인 눈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원하려는 의지이다. “당신이 보는 것은 ‘나’(인격)가 아니예요. ‘나’는 당신이 보는 것 그 이상이랍니다. ‘나’를 물건처럼 취급하지 마세요!”라고 호소하면서, 소유하고 착취하고 남용하려는 시선으로부터 방어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모델의 아름다움을 그려내려는 화가의 시선은 모델의 알몸을 훔쳐보는 사람의 시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화가 앞에서 모델은 자신의 알몸을 한껏 뽐내다가도 자신의 몸을 훔쳐보는 다른 눈을 의식하면 재빨리 몸을 가린다. 이런 의미에서의 ‘부끄러움(pudor)’을 『가톨릭교회교리서』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정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정숙은 인간들과 그들 사랑의 신비를 보호한다.”(제2522항 참조)고 가르친다. 몸에 깃든 창조주의 계획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포르노그래피는 권력과 지배의 언어로 몸과 성을 말한다. 거기엔 폭로의 기호들이 난무하지만 계시의 공명은 없다. ‘너’는 없고 오로지 ‘나’만 있다. 몸뚱어리가 있을 뿐, 인간(인격)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