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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도 사목교서 - 떠나라 (루가 10,3)

본문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1. 2017년은 전주 교구 설정 8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동시에 이 해는 새 주교님을 모시고 우리 교구 역사에서 새 장을 열게 될 해이기도 합니다. 저는 1990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으로부터 주교로 임명 받아 지난 27년 동안 이 직무를 수행해 왔습니다. 주교들이 만 75세에 은퇴하게 되어 있는 교회의 관례에 따라, 저는 교황님께 은퇴 청원서를 제출하고 새 주교님이 임명되시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우리는 교구의 역사를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훌륭한 주교님을 보내주시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러, 저로서는 그동안 신부님들, 수녀님들, 교우 여러분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협력에 감사드리면서, 여러분과 함께 걸어온 세월을 돌아보게 됩니다. 제가 교구장 직무를 시작하던 1990년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조직적인 무신론 체계였던 공산주의 세계가 서서히 붕괴되면서, 온 인류가 새 세상에 대한 꿈을 한껏 부풀리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천년기가 바뀌는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새로운 대림” 혹은 “새로운 대망”의 시대라고 표현하신 그 시점을 내다보며 큰 희망을 가지고 준비했습니다. 이제 와서 매년 발표한 사목교서들을 되돌아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정신을 구현하려고 시도한 점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특히 2000년 대희년에 발표한 특별 사목교서는 공의회의 4대 헌장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계시헌장’에 따라 하느님 말씀을 개인과 공동체의 삶 중심에 모시고 실천하기. ‘전례헌장’에 따라, 말씀과 성찬의 전례, 특히 십자가 희생을 ‘지금 여기’에 재현하는 성체성사를 생생하게, 또 생명의 잔치답게 기쁜 분위기 속에서 드리기. ‘교회헌장’에 따라, 성직자와 평신도 등 하느님 백성 전체가 높낮이 없이 같은 존엄성을 가지고 서로 보완하며 교회의 사명을 함께 수행하기. ‘사목헌장’에 따라, 우리가 교회의 안락한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빛과 소금이 되기. 이것이 처음부터, 특히 새로운 천년기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다짐하고 오늘날까지 계속 실천하기 위해 선택한 기본 방향이었습니다. 그 이후 해마다 나온 사목교서는 대희년 특별 사목교서를 바탕으로 하고 그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그 중에서 어느 특정한 측면을 그 해의 상황에 맞추어 좀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 이런 목표를 세우고 노력한 것이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돌아보며, 저는 형제 신부님들과 수도자, 교우 여러분들이 그동안 이루어내신 일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모든 분들에게 큰 축하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대단히 깊어지고 넓어졌음을 확인합니다. 여러 가지 모양의 성서 공부와 쓰기, 말씀 나누기, 전례 안에서의 말씀 봉독, 마음에서 우러나와 자기의 표현으로 드리는 생생한 기도, 신앙체험 발표 등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그와 함께 미사전례가 생명의 잔치답게 활기차고 기쁨이 넘치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외롭게 사시는 노인들도 이렇게 따뜻하고 생기 넘치는 전례에 참여하면 목욕탕에 들어가 깨끗이 씻고 난 것처럼 몸과 마음이 산뜻하고 새 힘이 돋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본당에서 새로 부임해 들어가신 신부님들이 전례가 놀랍게 활기를 띠고, 크고 작은 일에 서로 협력하며, 누가 어려움을 당하면 교우들끼리 알아서 찾아가 기도하며 도와주곤 하기 때문에, 사제인 자신이 그런 일에 특별히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목방문이나 견진성사를 위해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며, 그런 모습을 확인할 때마다 참으로 큰 기쁨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우리의 본당 공동체가 이렇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를 본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사도 2,47). 물론 어디에서나 전례가 주님 부활의 승리를 경축하는 잔치답게 활기와 기쁨에 넘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더 멀리를 내다보며, 신앙인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기쁨과 확신에 넘쳐 그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기 위해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3.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걸어갈 길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보편교회의 사목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교회를 위한 사목지침으로 내놓으신 [복음의 기쁨]에서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구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나 교황님의 이 사목지침을 받아들여, 세심하게 읽고 실천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이 길의 출발점과 이 여정을 걸어가는 데 필요한 힘을 얻고,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떠나라’고 당부하시는 데까지를 간단히 살피며 묵상하겠습니다. 우리 묵상의 출발점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임 베네딕도 16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가장 강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한 사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분을 만나 인생을 보는 눈이 새로워지고 삶의 방향을 다시 잡는 것을 의미합니다”(복음의 기쁨, 7). 그래서 우리는 이 사목교서의 제1부에서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묵상하고, 제2부에서는 그 만남에서 발견한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밖에 나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명에 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루가복음은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의 이 두 단계를 간단한 문장 속에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들이 예수께 가까이 왔을 때에 예수께서는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이것은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3-15). 물론 이것은 개인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걷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뛰라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이제 막 퇴원한 사람에게는 회복기간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성숙의 시간과 단계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강요할 수는 없고,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에게는 “오랜 동안의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 없다”(복음의 기쁨, 120)는 점은 언제나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가보지 않은 길에서 떼는 첫발이 나머지 삶을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제1 부

예수께서는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4.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주님을 깊이 만날 때,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복음의 기쁨, 1). ‘기쁨’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마리아를 찾아온 천사의 첫마디는 “기뻐하여라!”(루가 1,28)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의 축하를 받고 마리아의 입에서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 하는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복음’이라는 말이 ‘기쁨을 주는 소식’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은 그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실제로 기쁨이 넘치게 되고 삶이 온전히 새로워진 가장 대표적 성서 인물 가운데 하나를 우리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발견합니다(요한 4,1-42 참조). 이 여인은 우물물로 상징되는 물질에서 출발하여 사람,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세 대상에 대한 3중의 갈증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의 처지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한 성서의 이 대목을 좀 더 가까이 살펴봅시다. 먼저, 우물물을 길으러 샘에 나온 이 여인이, 앞서 와 계신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처음에는 ‘유다인’이었다가, ‘선생님’, ‘예언자’를 거쳐서, 마침내 ‘메시아’로 바뀌어가는 것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을 점점 깊이 만나 상대방의 정체를 깨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이 말씀대로, 이 여인은 지금 그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는 것입니다.

 

5. 대화는 예수님 쪽에서 그 여인에게 “물을 좀 주시오” 하고 청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인간과의 만남에서 먼저 첫 발을 떼는 쪽은 항상 하느님이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요한 15,16).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더구나 이 만남은 여러 면에서 상식을 크게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접촉해서는 안 되는 천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사는 지역에 들어가는 일조차 대단히 마음내켜하지 않았습니다. 또 유다인들은 밖에서 여인을 만나는 것을 극히 꺼려서, 그들 가운데 어떤 무리는 밖에서 다른 여인을 쳐다보기만 해도 그 순간부터 눈을 감았기 때문에, 담벼락이나 건물 등에 부딪치는 일이 많아서 얼굴에서 피가 나고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대가 보통 여인도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인데다가 겉 차림새만 보아도 삶이 완전히 헝클어지고 망가진 사람이었으니, 보통 유다인으로서는 가까이하는 것만도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습니다.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갔다가 돌아온 제자들이 그 만남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여인 자신에게는 말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당신은 유다인(남자)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여기서 우리는 그 옛날 예언자 엘리야가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고, 이교 지역인 시돈 지방의 사렙다 마을에 가서 한 과부를 만나는 장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1열왕 17,8-16에 소개되어 있는 그 이야기 역시 예언자가 한 과부를 만나서 물을 좀 달라고 청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물을 가지러 가는 과부의 뒤에 대고 예언자가 이왕이면 빵도 한 조각 가져다달라고 하자 그 여인은 대답합니다. “구운 빵이 없습니다. 있다면 천벌을 받아도 좋습니다. 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뒤주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 몇 방울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조금 주어다가 저희 모자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는 것이나 모두 먹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때 예언자가 말합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시오. 집에 들어가서 방금 말한 대로 음식을 준비하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 나에게 먼저 한 조각 가져오고 그 후에 아들과 함께 들도록 하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릴 때까지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리라.’” 과부는 이 말을 듣고 집 안에 들어가 하느님의 사람이 말한 대로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일어난 놀라운 일을 성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엘리야와 과부 모자에게는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 엘리야가 전한 야훼의 말씀 그대로 뒤주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도 동이 나지 않았다.” 하느님은 사랑,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엘리야와 예수님이 모두 인생의 막장에 이른 여인들에게 무언가를 청하시고, 그들이 ‘줌으로써’ 하느님을 닮을 수 있게 하십니다. 자기도 굶어 죽을 지경이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먼저 남에게 주는 일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뜻밖에도 모자람이 없게 된 것입니다. 다시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이 여인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놀라움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우물물을 청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시작된 대화는 계속 진행되다가 마침내 그분이 모든 사람에게 주고자 하신 바로 그 물 이야기로 건너갑니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물을 청하는 쪽이 바뀌어, 그 여인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6. 이 장면에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장벽을 뚫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경계도 뛰어넘어, 길 잃은 양과 같은 한 사람을 찾아오시는 모습입니다. 먼 여행과 한낮의 땡볕에 지친 몸을 이끌고 그분은 먼저 우물가에 와서 기다리십니다. 인간이 우물물에 목말라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목말라하는 갈증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시내에 가서 음식을 사다 예수님께 잡수시라고 권했을 때,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음식이 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요한 4,32-33절). 예수님께서는 다른 자리에서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그렇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요한 6,39-40). 또 우물은 이사악, 야곱, 모세 등 이스라엘 역사에서 많은 이들에게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한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여기서도 우물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성서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익숙한 여러 명칭을 쓰십니다. 목자, 왕, 아버지, 주인, 남편은 가장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남편 혹은 부부관계는 인간의 경험에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가장 깊고 강력한 관계 혹은 사랑을 대표합니다. 남녀 사이의 이 사랑은 “뛰어난 사랑의 원형처럼 보여, 그와 비교할 때 다른 온갖 사랑은 빛을 잃는 듯합니다”(베네딕도 16세,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2항). 그만큼 남녀가 서로를 향해 느끼는 끌림은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강한 갈증을 표상합니다. 성서에서도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란 ‘부부’를 가리킵니다(창세 1,26-27). 그렇기 때문에 부부관계는 사람이 자기 안에 새겨진 하느님 모상을 실현하는 제일 가깝고도 일반적인 길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본래 그렇지만, 부부관계는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만나야만 인간으로 깨어납니다. 남성은 여성을 만나야 남자로 깨어납니다. 여성도 남성을 만나야 여자로 깨어납니다. 남녀가 몸, 정신, 영혼을 다해 만나면 자기 안에 잠들어 있던 ‘하느님의 모상'이 깨어납니다. 몸만 만나면 몸만 깨어납니다. 부부는 서로 상대방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깨워주는 가장 대표적인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은 각자의 얼굴이 다른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하고, 우주 천지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모습으로 각 사람 안에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잠들어 있습니다. 누군가 나타나서 그 사람의 유일성을 인정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만들어 거기에 잠재워 두신 공주, 아니 하느님의 모상이 깨어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수많은 남성을 만났지만, 그 누구와도 몸을 스치는 정도를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느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깨워주실 때 비로소 그 안에 하느님의 모상이 깨어났습니다.

 

7. 많은 예언자들이, 충실한 남편인 하느님과 불충한 아내라는 표상을 빌려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아내가 자신을 버리고 외간 남자와 놀아났다가 돌아오는 체험을 통해서, 불충한 백성이 결국 돌아오기까지 참아내시는 하느님의 끝없는 인내와 자비 그리고 사랑의 힘이 결국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2,2.20; 31,3), 에제키엘(16,1-43), 이사야(40-55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자기 남편인 야훼와의 계약을 깨뜨리지만, 남편인 주님께서는 상대방이 “처녀였을 때 약혼했던 것을 생각하고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계약을 맺을 날”을 예고합니다(에제 16,59-63; 이사 61,10; 62,4-5 참조). 특히 이사야는 말합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여자’라 하지 아니하고 너의 땅을 ‘소박데기’라 하지 아니하리라. 씩씩한 젊은이가 깨끗한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듯 너를 지으신 이가 너를 아내로 맞으신다”(이사 62,4-5). 바로 그 예언이 드디어 지금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아니 그 예언조차 이 현실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버림받은 여자’, ‘소박데기’처럼 살고 있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온갖 장벽을 다 허물고 뛰어넘어 우물가로 오신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8). 지금 그분께서는 이 여인 속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이끌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물물에서 시작된 대화는 더욱 깊어지면서 마침내 그 여인이 지닌 갈증의 깊은 뿌리로 향합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너라.” 남편 - 그 여인이 앓고 있는 소갈병의 뿌리는, 일단, 인간관계, 그 대표 격인 남편 문제에 있었습니다. 우물물에 대한 갈증은 그 증상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그 여인은 메시아의 도움으로 그 뿌리를 정확히 알아내고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깊이 감추어 두었던 비밀이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요한 2,25)의 눈길을 받자, 햇빛을 받아 스스로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열립니다. 그 여인은 지난날에 지은 죄의 올가미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기자가 베드로의 후계자로 갓 선택된 분의 본래 이름을 대며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는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께서 눈길을 보내주신 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신 그 눈길은 2천 년 전에 사마리아 여인이 받았던 눈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눈길을 받자 여인은 자기 입으로 깊이 숨겨두었던 자신의 비밀을 열어 보입니다. “남편이 없습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가 있지만, 그가 남편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실토한 것입니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요한 4,18). 이제 그 여인의 고백과 그것을 확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문제의 뿌리가 드러났습니다. 상대방을 바꾸어가며 수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그것은 여인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했고, 그것은 오히려 점점 더 심해져만 갔습니다. ‘사막’, ‘황무지’, 혹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은 그 여인의 내면을 잘 그려줍니다. 물질, 명예, 권력, 쾌락 등의 올가미에 갇혀 사는 동안 인간이 겪는 내면의 처지를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8. 그런데 인간관계만으로 인간의 갈증이 완전히 해소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 스스로 하느님 이야기를 꺼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지, 사마리아인들은 거기가 그리짐 산이라고 하고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이라고 하니, 도대체 어느 쪽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 여인 스스로 말합니다.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시겠지요.” 바로 그 때, 예수께서는 복음서 전체에서 처음으로 당신의 정체를 스스로 밝히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어(출애 3,14), 이스라엘을 노예의 땅에서 자유의 땅으로 이끌어낼 힘을 주셨던 것처럼,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때가 되기 전에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시지 않고, 베드로의 고백으로 그것을 알게 된 열두 제자들에게마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던”(마태 16,20) 바로 그 비밀을, 여기서 그 여인에게는 스스로 밝히십니다. 예수님과 여인이 각기 자신의 내면을 두려움 없이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느님과 인간이 가장 깊이 만났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표지(기적)를 보여주심으로써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당신이 지으신 백성과 결혼하기 위해서 오신 하느님이심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넌지시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초상집 같은 슬픔의 시대는 가고 혼인잔치 같은 기쁨의 시대가 왔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살진 고기를 굽고 포도주를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술을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이사 25,6). 이제 여인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물물, 남편, 하느님을 향해 품고 있던 3중의 갈증이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9. 이렇게 해서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으로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명’, 그리고 그곳을 향해 가는 그 여인의 여정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요한 14,9)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만났으면 곧 하느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제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이사 35,6)던 예언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8)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여인의 속에서는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물물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우물가에 내버려진 물동이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제 그 여인은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새 인간”(골로 3,10)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를 비롯해서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그 여인도 곧바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부끄럽던 과거까지 사람들에게 그분을 증언하는 수단으로 바뀝니다.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 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요한 4,29). 이렇게 해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증명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구원의 역사가 완성 점에 이르면, “어린양의 아내인 그 신부”(묵시 21,9)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신랑인 어린양이 신부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목마름을 결정적으로 풀어주실 것입니다(묵시 22,17 참조). 이것이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10. 이런 그림을 배경으로 우리 주변과 세상을 바라봅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다가 가장 짧은 시간에 제일 부요한 나라에 속하게 된 대표적인 국가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니 어려웠던 시절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어두운 그림자와 절망의 물결이 온 땅에 들이 닥쳤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벌어지고, 물질, 권력, 명예, 쾌락을 우상처럼 섬기는 흐름이 해일처럼 넘실거립니다. 청년들은 희망을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조차 마음은 빠른 속도로 사막화하며, 인간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져 갑니다. 외로움은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혼자 사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 이 가운데에서도 외로움은 시대적 질병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주변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혼자”라는 느낌, 인간의 이 외로움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제일 심각한 사태입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 창조주께서 세상 만물을 하나하나 만드신 다음, “좋다, 참 좋다!” 하고 말씀하시다가, 단 한 번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 이렇게 세 위격으로 이루어진 가족-공동체인 하느님께서 그런 당신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인간은 공동체일 때에만 자신의 원형을 닮고 자기를 실현하며 행복과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단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바꿀 것을 주문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본당 사목구를 “공동체들의 공동체”(28항)가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기초공동체’, ‘소공동체’ 등으로 불리는 지역별 모임에서, 하느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그렇게 해서 주님을 만나 기쁨과 힘을 얻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쁨과 힘을 얻은 신앙인들이, 동네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11. 순교자 황일광(1757-1802)은 당시 사회에서 천민으로 멸시를 받는 백정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당시의 관행에 따라, 마을 공동체 안에 살지 못하고 그 울타리 밖에서 지내야 했고, 일반인들의 집 안으로는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나니, 교회 공동체는 그를 형제로 받아주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귀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는 새로 태어난 기쁨을 맛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천국이 둘 있다. 하나는 하늘에 가서 들어가는 천국이고, 또 하나는 여기 세상에서 들어가는 교회다.”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포졸들에게 잡혀 감옥에 갇힌 그는 여유 있게 말재주까지 부리며 말했습니다. “포졸들이 나를 남원에서 옥천으로 데려왔네!” 나무(남원)하러 나갔더니 포졸들이 나를 옥천(옥이라는 천국)으로 데려 왔다는 뜻이었습니다. 복음을 통해 주님을 만난 그에게는 감옥도 이미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복음을 들여온 이들은 외국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 우리의 선조들이었습니다. 그것도 평신도들이었으며,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신 103위 순교자들, 2014년에 복자로 선포되신 124위 순교자들 가운데 절대 다수가 평신도들입니다. 사제와 수도자들도 이런 정신을 이어받은 부모님들에게서 태어난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의 정신은 지금도 계속 살아서 한국 교회 특유의 활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서운동, 여러 신심단체나 선교운동을 통해서 이미 많은 신앙인들이 선교사로서의 훈련을 잘 받고 훌륭하게 활동해 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교회 구성원 모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제, 예언자, 왕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한다면,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대로 소공동체를 통해서 그 사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스도 신앙이 무엇인지, 참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삶의 우선순위 맨 앞에 두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대로 “오랜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120). 우리 교구 어느 시골에 사시는 한 할머님(84세)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증언하는 분들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75세에 병으로 쓰러지셔서 담당 의사가 가족에게 장례를 준비하라고 권고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동안 어떤 수녀님이 오셔서 기도하실 때 놀라운 꿈을 꾸고 깨어나 곧바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성당에 다니다 보니 레지오 마리애 교본, 성서, 미사 책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한글을 깨우쳐 성서 필사까지 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당신의 집을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으로 내주시고 온갖 봉사를 하셨는데, 그 모습에 감동해서 사실상 마을 인구의 전체라고 할 수 있는 25명이 세례를 받고, 버스를 타야만 하는 거리에도 불구하고 모두 성당에 나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올해는 84세가 되셨는데, 여전히 건강한 몸으로 활동하시며, 세상에 사시면서도 이미 천국에 사시는 것처럼 기쁨에 차 있는 그분의 모습이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놀라운 기쁨을 맛 본 이들입니다. 일흔 두 제자도 복음선포 활동을 마치고 “기쁨에 넘쳐” 돌아왔고(루가 10,17), 그들의 기쁨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루가 10,21) 외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루가 10,21).

 

12.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과 결혼에 관한 복음성서 대목에서 우리의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결혼은 한 사람에게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가장 공적인 의미도 있어서 한 사회와 나라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남녀의 만남과 거기서 출생할 자녀가 함께 이루는 가정은 사회의 기본 세포로서 나라와 세상의 건강과 명운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내면 가장 깊숙한 데서 만난 사람은 곧바로 세상을 위한 소금과 빛이 될 사명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시편 85,10) 세상을 만드는 일에 한 몫을 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182).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에만 몰두하여 이웃과 사회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가짜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유형입니다”(2015.5.28 강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런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는 누구나 주님의 마지막 당부를 실천하는 사도가 될 사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제 2 부

“떠나라!”

이것은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13.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곁에 ‘천막을 치고 사신 것’(요한 1,14 참조)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세상에 보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각 개인과 사회 구석구석에 하느님의 정신, 그 영이 스며들어 정의와 사랑이 가득한 세상으로 만들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일을 위해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뽑아 언제나 곁에 두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나 초라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에다 일자무식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이렇게 나가는 그들의 명단은 마태오에 이르러서야 글을 알고 셈을 할 수 있는 인물에 이르지만, 그는 무식보다 더 큰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침략국 로마에 붙어서 동족을 착취하는 매국노에 도둑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창녀와 함께 망가진 인간의 표본처럼 취급받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아임을 알아봄으로써, 스승으로부터 더할 수 없는 칭찬과 함께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가 밝혀지면서, 이번에는 같은 스승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말씀과 함께 정 반대 쪽으로 떨어지기도 한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최측근 3인방을 이룬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역시 스승이 죽음을 바로 앞두고 있을 때까지 현세적 출세에만 눈이 어두운 인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열두 제자 중의 하나는 스승을 적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신 끝에 뽑아 곁에 두고 가르치시던 열두 제자들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주님께서 맡겨주시는 복음선포 사명을 실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적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실제로 이루어진 역사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행전에서 확인합니다.

 

14.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 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 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마태 10,7-8).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병자들을 길거리에 메고 나가 들것이나 요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행여나 그 그림자만이라도 그 몇 사람에게 스쳐 갔으면 하였다”(사도 5,15)고 루가는 증언합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겠기 때문이다”(요한 14,12-13). 주님의 이 말씀은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믿지 못했고, 그 누구도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1고린 2,9)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겠습니까? 이에 관해서 사도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의 결론인 20장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5.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달음질을 하여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곧 떠나 무덤으로 향하였다. 두 사람이 같이 달음질쳐 갔지만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곧 뒤따라온 시몬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 가 그도 역시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수의와 함께 흩어져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그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제자는 숙소로 다시 돌아갔다. 한편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마리아가 몸을 굽혀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하고 물었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예수께서 거기에 서 계셨다. 그러나 그분이 예수인 줄은 미처 몰랐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셔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모셨는지 알려 주셔요. 내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께 돌아 서서 히브리말로 “라뽀니” 하고 불렀다. (이 말은 “선생님이여” 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고 전하여라” 하고 일러 주셨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러 주신 말씀을 전하였다.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 하셨다.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동이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이 장면, 바로 이 자리가 두 번째 천지개벽의 현장입니다. 옛 세상은 사라지고 새 세상이 도래한 순간입니다. 거짓말의 아비인 악마가 통치하던 시대가 가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통치하시는 시대, 곧 ‘아버지의 나라’가 온 현장입니다. 치욕과 실패의 상징이던 십자가가 영광과 승리의 상징으로 드러난 순간입니다. 연약한 제자들이 스승처럼 용감한 사도로 태어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사람들 ‘곁’에 머무시던 시대가 가고,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그들 ‘안에’(요한 14,20) 계시는 시대가 시작된 날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이 “위에서 오는 능력”(루가 24,49)을 받은 순간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하신 주님의 예언이 마침내 이루어져서, 그들이 ‘제자’ 단계를 졸업하고, 마침내 ‘사도’가 된 날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소개된 장면은 여기에 이미 소개된 일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이제 그들은 ‘주님의 뒤를 따라다니던’ 제자가 아니라, ‘그분을 뒤에 두고 떠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끝까지 가서 사람들을 악마의 통치로부터 이끌어내어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새 세상으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라는 건물을 떠받치는 바위요 초석입니다. 이것이 빠지면 복음도, 교회도, 신앙도, 온갖 종교행위도 다 허물어집니다. 하늘에서 오는 능력, 성령을 받고 이제 돌이켜 보니, 예수님께서 생전에 그토록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온갖 질병을 고쳐주시고 악령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것도 같은 성령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스승이시던 나자렛 예수를 ‘성령을 받은 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들어 주시던 날에 일어난 일이,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자신들에게 일어났음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하늘에 오르셔서 받으신 모든 힘, 능력, 권세는 제자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제자들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 ‘속’으로 들어가셔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시며 함께 계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이를 더욱 분명히 증언합니다. “주님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다 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이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마르 16,19-20). 그렇게나 겁이 많던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사도 9,27.28; 13,46; 14,3; 18,26; 19,8; 28,30). 겁이 많아 세 번씩이나 스승을 배반했던 베드로는 이제 요한과 함께 의회의원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겠는지 한번 판단해 보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사도 4,19-20). 의회의원들조차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사도 4,13)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7.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된 모든 신앙인은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수행할 사명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교회헌장, 33-36). 공의회의 이 가르침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대로, 이제는 사제나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교우들도 하느님 백성으로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능력을 활용하고 사명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각자 살고 있는 지역에서 전쟁터에 설치된 “야전병원”(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께 활짝 열린 마음, 제1부 7장)에서 일하는 일꾼이 되어, 먼저,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오가 된 이들을 치료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살이에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는 이들을 참 삶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뛰어들어야 하겠습니다.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는 교회에게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까이 다가가는 일, 친밀성이 필요합니다. 저는 교회를 전쟁이 끝난 다음의 야전병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심한 부상을 당한 사람에게 콜레스테롤이나 혈당 수치를 묻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선 상처부터 치료해 주어야지요. (....)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미사에 나오지 않는 사람, 교회를 떠난 사람 혹은 전혀 무관심한 사람들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 사목자가 스스로 책임진 공동체를 얼마나 가까이 접촉하고 만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척도는 바로 ‘강론’입니다. 강론하는 이는 자기가 책임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하고,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갈망이 생생하게 불타오르는 곳이 어디인지를 볼 수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받은 분들 가운데 이른바 “잃은 양”으로 분류되는 이들이 어느 정도인지를 생각할 때, 교황님의 이 말씀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잃은 양” 찾기를 동시에 할 때에만, “어린양 찾기”가 그 본래의 뜻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하시는 주님의 당부를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 이 일은,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사명입니다. 하느님의 능력보다 먼저 인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을 떠나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지팡이나 식량자루나 빵이나 돈은 물론, 여벌 내의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루가 9,3). 당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 루가 9,58).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에게 제일 큰 장애는 “세상 걱정과 재물과 현세의 쾌락”(루가 8,14)입니다. 재물, 명예, 권력, 쾌락은 다 좋은 것입니다. 창조자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좋다”고 하신 것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종으로 부려먹을 때만 그것들은 좋은 것입니다. 반대로 그것들이 주인이 되어 우리를 종처럼 끌고 다니게 되면, 그것들은 우상이 되고 우리는 그 사슬에 철저히 묶여 사는 꼴이 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런데 지금 우리가 경험하듯이, 오늘날 재물, 명예, 권력, 쾌락의 힘은 참으로 강해서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이겨내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성령의 칼인 하느님의 말씀”(에페 6,17 참조)을 듣고,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요한 6,51)을 먹어서, 늘 새로운 힘을 받아야 합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7).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기억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으로 한 가지만을 유언으로 당부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23-26). 성체성사, 십자가 제사의 재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성사, 죽음을 물리친 생명의 축제. 루가복음 24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뒤, 낙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를 잘 말해줍니다.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루가 24,25-27). 성서 전체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목적지로 해서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린 옆구리로부터 피와 물을 다 쏟으실 때 완성되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루가 24,30-31).

 

19. 이제 제자들은 스승의 생전에 들었던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루가 12,49-50).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내다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으로부터 이미 세례를 받으셨는데 또 세례를 받아야 한다니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어떤 세례를 또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까?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 하고 청탁하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마르 10,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받으셔야 할 세례는 십자가에서 창에 찔려 피와 물로 다 쏟아 온 몸이 흥건하게 젖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 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가 3,16; 마태 3,11참조). 세례자 요한이 예고한 성령과 불의 세례를 사람들에게 베푸시기 전에 예수께서 먼저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세상에 지를 불이란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건네주실 수 있게 된 성령의 불, 사랑의 불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벗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신 말씀대로, 우리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사랑의 불을 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령의 불길이 십자가 제사의 재현인 성체성사 안에서 타고 있습니다. 그 옛날 떨기 가운데에서 활활 타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태워 없애지는 않던 그 불길, 그리고 거기서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알려주셔서 이스라엘 해방의 대역사를 이룰 수 있게 해 주신 그 사건(출애 3장 참조)은 여기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십자가 나무에서 사랑의 불길은 비할 수 없이 더 뜨거운 열기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길이 십자가 희생을 재현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계속 타고 있습니다.

20. 성령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기 때문에, 그 불길은 ‘그때’ ‘거기’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똑같은 열기로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체성사가 계속되는 한, 이 불길은 언제까지나 타오르면서 그 열기가 가 닿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새로 태어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 불길 속에서는 습관성도, 기계적 반복도, 무의식적 의례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언제나 ‘처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첫 순간의 감동이 있고, 떨림이 있고, 놀라움이 있고, ‘두려움과 이끌림’이 있습니다.
   이 불길, 이 놀라움의 영역을 벗어나면, 거기에는 기계적 반복, 생명 없는 의례, 귀만 울리는 꽹과리 소리만 남습니다. 종교에 몸담은 사람은 직업인으로 전락하고, 마태오복음 23장에 모아놓은 온갖 문제가 이어집니다. 태양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이 얼음으로 뒤덮이는 모양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제사, 성체성사를 재현합니다. 주일마다, 아니 날마다 미사를 봉헌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성령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몸을 먹어 힘을 얻게 됩니다.

21. 그런데 여기까지는 준비, 절반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반은 성당 밖, 세상에 나가서 해야 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사제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마지막 이 당부를 실천하기 위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은”(요한 17,14.16. 참조) 그리스도인들이 사제, 예언자, 왕으로서의 자기 소명을 깨닫고 세상에 나가 그 사명을 실천할 때, 교회는 전혀 달라지고 세상은 완전히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 마칠 때까지 언제나 함께 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지금 우리 하나하나와 공동체에게 촉구하십니다.
  
“떠나라!”

2016년 대림 첫 주일에
천주교 전주교구장  이 병 호(빈첸시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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