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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公所)] 47.전주교구 연지동본당 한교·신평공소[가톨릭평화신문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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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12-14 조회 58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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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교우들의 전교로 교우촌 이룬 보기 드문 공소

[공소(公所)] 47.전주교구 연지동본당 한교·신평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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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연지동본당 한교공소는 나바위본당 교우 몇 가정이 이주해와 1947년 설립한 공소로 교우들이 옹기를 구우며 전교를 해 마을 전 주민을 복음화시켜 교우촌을 이룬 공소이다. 한교공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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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연지동본당 신평공소는 장성에서 이주해온 김기만 회장이 전교를 해서 설립한 공소이다. 김 회장은 자신이 직접 교리를 가르쳐 1952년 11월에 97명을 영세 입교시켰다. 신평공소 전경.

전라북도 정읍시 북면에는 전주교구 연지동본당 관할 한교공소와 신평공소가 있다. 이들 두 공소는 해방 이후 이 지역으로 이주한 교우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전교로 마을 주민들이 세례를 받고 가톨릭교회로 입교하면서 설립된 신앙 공동체들이다.

연지동본당은 1985년 1월 정읍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본당이다. 이 때문에 1903년 설립돼 80여 년간 정읍의 유일한 본당이었던 정읍본당은 ‘시기동본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연지동(蓮池洞)은 옛날 이곳에 연꽃이 많이 핀 못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제3대 전주지목구장 김현배 신부 착좌

한교와 신평공소 소개에 앞서 해방 직후 전주교구의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자. 당시 교회 상황, 특히 전주지목구장의 사목 방침과 이에 따른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신앙생활이 어떠했는지에 관한 선지식이 한교와 신평공소 설립 배경을 잘 이해시켜주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당시 전주지목구는 지목구장이 바뀌는 커다란 변화를 맞는다. 1946년 1월 제2대 전주지목구장 주재용 신부가 제4대 대구대목구장으로 임명돼 떠나고, 그해 7월 교황청 포교성성은 김현배 신부를 제3대 전주지목구장으로 임명했다. 1946년 8월 24일 전동성당에서 제3대 전주지목구장으로 착좌한 김현배 신부는 교구에 대한 애정과 일치, 화목, 서로 간의 존중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신임 지목구장 김현배 신부는 뇌졸중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던 선배 신부를 수발하면서 대소변을 받아낼 만큼 착한 사제였다.

김현배 신부는 1946년 10월 교구민에게 보내는 첫 번째 효유문(曉諭文)을 발표했다. 이 사목 교서에서 김 신부는 일제의 종교 탄압으로 움츠러들었던 신앙생활에서 깨어나고 일제 치하에서 물들었던 악습을 떨치고 새롭게 태어나자고 교구민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물질적 빈곤이 초래한 물질 만능주의ㆍ현세 제일주의 사고를 회개하고 박해 시대를 살았던 신앙 선조들의 신심을 본받자고 촉구했다. 김 신부는 특히 청년들에게 교구의 성쇠가 청년들의 열심한 신앙생활 여하에 달려 있다며, 청년들의 좋은 표양이 주교와 신부들의 10번 강론보다 살아있는 전교가 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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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공소는 6ㆍ25전쟁 직후 교우들이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돌을 쌓아 지은 공소이다. 적벽돌로 깔끔하게 개축한 한교공소 내부.


1946년 새 성당 기반으로 지역 복음화 나서

김현배 신부가 제3대 전주지목구장으로 착좌한 1946년은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던 해이기도 했다. 전주교구뿐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에서 순교자 현양 운동이 불꽃처럼 일어났고, 아울러 성모 신심이 들꽃처럼 피어나던 해였다. 이 시기 전주교구는 가톨릭연맹을 결성해 평신도 조직을 활성화하고 교우들의 신앙 쇄신과 전교 활동에 주력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읍에선 미군정관의 도움으로 1946년 정읍(시기동)성당 터를 잡을 수 있었다. 제7대 정읍본당 주임 박성운(베네딕토) 신부는 정읍 수성동에서 시기동으로 본당을 옮긴다. 성당 터는 정읍군에서 가장 좋은 적산 가옥이었다. 아래층은 성당으로, 위층은 사제관과 사무실로 사용했다. 당시 이 집은 미군 장교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던 것을 미군들로부터 인수받은 것이다. 정읍본당은 새 성당을 기반으로 지역 복음화에 적극 나섰다.

연지동본당 한교공소는 전북 정읍시 북면 북산촌2길 9-7에 자리하고 있다. 정읍에서 전주 방면으로 국도를 따라 8㎞ 떨어진 구릉에 있다. 1920년께 나바위본당 교우 몇몇이 이주해와 옹기를 구우며 신앙생활을 했다. 1947년 한교공소가 정식으로 설립됐고, 초기에는 공소 건물이 없어 이정원(프란치스코) 회장 집에서 봄ㆍ가을 판공을 지냈다. 그러다가 김차석(바르톨로메오) 제4대 공소 회장이 주축이 돼 교우들이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성당의 벽돌을 하나하나 직접 쌓아 현재의 공소 건물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교공소는 최근까지 전 주민이 신심 깊은 교우일 만큼 모범적인 공소로 손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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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쇠락한 공소이지만 신평공소 교우들은 신앙의 뿌리를 깊이 간직한 채 복음 전파에 적극 나서고 있다. 신평공소 내부.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전교로 주민 복음화

신평공소는 전북 정읍시 북면 동신2길 16에 자리한다. 신평공소는 1948년 2월 김기만(타대오) 회장이 가족과 함께 전남 장성에서 이주해오면서 시작됐다. 김 회장은 농사를 지으며 틈날 때마다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을 행사와 이웃의 애경사에 적극적으로 나서 모범을 보였다. 그리고 본당 허락을 받아 자기 집에서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1952년 11월에 97명을 영세 입교시켰다. 그때부터 신평공소라 이름 짓고 공소 기반을 다졌다. 1959년 공소의 모든 교우가 힘을 합쳐 공소 건물을 마련했다. 이후 1976년 새 공소 대지를 마련하고, 다음 해 8월 지금의 공소를 봉헌했다.

정읍 연지동본당 한교ㆍ신평공소는 해방 직후 신임 교구장의 신앙 쇄신 요청과 성모 신심, 순교자 현양 운동을 기반으로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통해 지역을 복음화하고 신앙 공동체를 이룬 보기 드문 공소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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