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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45) 전주교구 시기동본당 신성공소[가톨릭평화신문 202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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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12-04 조회 547회

본문

 

1903년 설립된 유서 깊은 정읍 지역 신앙의 못자리

[공소(公所)] 45. 전주교구 시기동본당 신성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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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칸 회합실로 사용되던 시기동본당 신성공소 초가. 지금은 교우들과 순례자들의 사랑채로 이용되고 있다.


전주교구 시기동본당 신성공소는 전북 정읍시 신성길 176-17에 자리하고 있다. 신성공소는 1903년 6월 본당으로 설립돼 올해로 120년 된 유서 깊은 정읍 지역 신앙의 못자리다.

현재 신성공소에는 1909년 지어진 4칸의 한옥 사제관(공소)과 회합실로 사용하던 6칸짜리 초가를 비롯해 성당 주위에 둘러쳐져 있는 돌담,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빵을 굽던 화덕 터, 음식물을 냉장 보관했던 석빙고 등이 남아있다.

2002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0호로 지정된 신성공소는 2003년 11월 시기동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국비와 전라북도 도예산을 들여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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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시기동본당 신성공소는 병인박해 당시 충청도 지역 순교자들의 가족과 후손, 동료 교우들이 피신해 교우촌을 이룬 정읍 지역 신앙의 못자리이다. 복원된 신성공소 내부.

순교자 가족과 후손들이 일군 신앙 공동체

신성(新城)은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이다. 규장각이 1789년 전국 가구 수와 인구수를 기록한 「호구총수(戶口總數)」는 정읍현 남일면 신성리(井邑縣 南一面 新城里)는 월성(月成) 위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밝히고 있다. 1914년 일제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내장면 신월리 신성(內藏面 新月里 新城)으로 개편됐다. 따라서 신성공소를 소개하는 일부 책이나 몇몇 글에서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신성(新城)이란 지명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신성에 교우촌이 자리하기 전에 이미 도강 김씨(道康 金氏)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백두대간 호남정맥을 끼고 있는 정읍 일대는 조선 왕조 치하 박해시대 때부터 충청도 지역 교우들이 유배되거나 피신해 많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이기정의 조카 이재섭이 충주에서 정읍으로, 이기정의 아들 이종덕이 태인으로 유배됐다. 1850년대에는 정읍 죽림(내장면 쌍암리)에 순교자들의 후손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정읍 산외면 구정리에는 충청도 진잠 출신 병인박해 순교자 한재권(요셉) 성인 가족이, 정읍 운암리에는 순교자 서정직(요한)의 아들 서 가롤로가 이주해 살았다. 신성에도 충청도 연풍 출신 병인박해 순교자 황석두(루카) 성인의 종조손 황 마르타가 이곳으로 박해를 피해 정착했다.

이처럼 신성을 비롯한 정읍 일대 교우촌들은 병인박해 때나 그 이후 순교자들의 가족과 후손, 그리고 동료 교우들이 숨어들어와 터를 잡은 신앙 공동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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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시기동본당 신성공소 제대. 현재 8칸 한옥 성당은 없어졌지만,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4칸 한옥이 복원돼 공소로 사용하고 있다.

정읍 일대 23개 공소 합쳐 신성리본당 신설

신성교우촌 공소 설립과 관련해 두 개의 서로 다른 기록이 있다. 전주교구 고(故) 김영구 신부가 쓴 「천주교 호남발전사」는 1889년 3월 첫 공소를 치렀다고 하고, 「천주교 전주교구사」는 1893~1894년에 설립됐다고 한다. 여하튼 공소 설립에 앞서 1882년 2월에 전주 교우 김순문이 신성으로 이사했고, 1년 뒤 김한경·배사진·김명보 등 교우 27명이 이주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 시기 나바위와 전주, 배재에서 사목하던 파리외방전교회 베르모렐ㆍ보두네ㆍ죠조 신부가 신성공소를 사목 방문해 판공성사를 줬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903년 6월 수류본당에서 정읍ㆍ순창ㆍ담양ㆍ창평ㆍ장성ㆍ고창ㆍ흥덕ㆍ무장의 23개 공소를 합쳐 신성리본당을 신설하고, 초대 주임에 김승연(아우구스티노, 1874~1945) 신부를 임명했다. 김 신부는 내장면 신성리에 성당을 짓기로 정하고 사랑채가 있는 네 칸짜리 집과 부지 1200평을 매입해 정읍 일대 복음화 본거지로 삼았다. 신성리는 정읍 읍내에서 4㎞, 수류본당과는 24㎞ 떨어진 거리였다.

본당 설립 당시 신성리 주민 30호 가구 중 교우는 여섯 가정이었다. 교우들보다 외교인이 많이 살던 마을이다 보니 토착민들의 텃세가 심했다. 땅이 없던 교우들은 소작하거나 화전을 일궈 담배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는데 토착민들이 그 땅마저 빼앗으려 해 갈등이 잦았다. 또 지역 내에서 크게 교세를 떨치던 개신교인들의 집요한 방해를 받아야만 했다. 1907년 3월 개신교인 김춘화가 선교에 방해된다며 배사진(바오로) 전교 회장을 납치하고 성당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했다. 이 사건이 있었던 후 2개월 뒤 파리외방전교회 미알롱 신부가 제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미알롱 신부는 교우들을 교육하고 주민들과의 갈등을 해소한 후 1909년부터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성당 부지에 직접 기와를 만드는 시설을 지어 성당에 쓰일 기와를 구웠고, 한국인 목수 8명을 고용해 8칸 한옥 양식의 성당과 4칸의 사제관, 6칸의 회합실을 짓고 성당 주변으로 돌담을 쌓아 1914년 완공했다. 공사 동안 남자 교우들은 집에서 한 달 치 양식인 쌀 한 가마니(80㎏)씩을 들고 와 노역 봉사를 했다. 돌담을 쌓을 때는 미알롱 신부가 한 단이 쌓이면 올라서서 발을 구르고 때로는 큰 망치로 내려쳐 이상이 없으면 다음 층을 쌓았다. 또 성당 출입문도 세 군데를 내놓아 정문은 본당 신부가 말을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높이 만들었고, 성당 우측 문은 남성 전용, 좌측 문은 여성 전용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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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시기동본당 신성공소는 1903년 정읍 첫 본당으로 설립된 유서 깊은 신앙공동체이다. 1909년 신축 당시 사제관으로 지어진 4칸 한옥이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2003년 복원돼 현재 공소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2003년 11월 첫 성당 터인 신성공소 복원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교세를 키우고 신앙생활을 유지했던 정읍본당의 신성리 성당 시절은 1931년 막을 내린다. 제4대 주임 고군삼 신부가 부임해 본당을 신성리에서 정읍 읍내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6년 제5대 주임으로 부임한 서정수 신부는 신성리 성당을 매각했다. 이로써 신성리 정읍본당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졌다.

정읍 시기동본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2003년 11월 23일 첫 성당 터인 신성공소를 복원해 제7대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했다. 현재 8칸 한옥 성당은 없어졌지만,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4칸 한옥이 복원돼 공소로 사용하고 있다. 또 6칸 회합실이었던 초가는 교우들과 순례자들의 사랑채로 이용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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