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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公所)] 41. 전주교구 칠보본당 동막공소[가톨릭평화신문 202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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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11-03 조회 5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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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간 공소 건물 없이도 신앙 지킨 뿌리 깊은 교우촌

[공소(公所)] 41. 전주교구 칠보본당 동막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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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칠보본당 동막공소는 병인박해 당시 경상도에서 피신한 교우들이 옹기 항아리를 구우며 일군 교우촌 공소로 지금까지 신앙의 명맥을 활기차게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신앙 공동체이다. 동막공소 전경.

전주교구 칠보본당 동막공소는 전북 정읍시 칠보면 동막길 49-24에 자리하고 있다.

칠보면은 일제가 우리나라 식민지 지배 체제를 굳히기 위해 1914년 행정 개편을 단행할 때 생긴 지명이다. 일제는 태인현 남촌일변면과 고현내면을 합쳐 칠보산(七寶山) 이름을 따 ‘칠보’라 했다. 호남정맥의 지맥인 칠보산은 내장산보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읍의 진산(鎭山)이다. 산 북면은 가파르지만, 남면은 밋밋하다. 산 높이(해발 469m)에 비해 골이 깊어 예부터 피난민들의 은신처로 이용됐다.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운동 때 주민과 농민군들의 피난처였다. 또 6ㆍ25 전쟁 때는 빨치산의 보급로로 사용됐다. 아울러 1866년 병인박해 당시 경기ㆍ충청ㆍ경상도 교우들의 피난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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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설립된 동막공소는 60년간 공소 건물 없이 교우집을 돌면서 공소 예절을 하다 1957년 처음으로 흙집을 지어 공소로 사용했다. 이후 1986년 지금의 공소를 축성해 사용하고 있다.


병인박해 당시 경상도 교우들의 피난처

칠보면 북쪽이 산간 지대라면 동쪽은 칠보천과 동진강을 끼고 형성된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런 지형 조건으로 칠보면은 정읍 산내면과 산외면, 순창군 쌍치면으로 통하는 중산간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해왔다. 박해를 피해 모악ㆍ회문ㆍ칠보산 등지로 숨어든 교우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동진강 일대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교우촌을 이루고 신앙생활을 했다. 병인박해 이후 1882년부터 1911년까지 태인, 정읍 지역에 교우촌을 근거로 형성된 공소가 563개나 될 만큼 교세가 확장됐다.

이 시기 동진강을 따라 설립된 공소가 칠보면 반곡리 동막공소, 산내면 능교리 능다리공소, 산외면 상두리 구장리공소, 종산리 원바실공소, 옹동면 상산리 닥배미공소, 태인면 거산리 신기공소, 태창리 태산공소다. 또 정읍천을 따라 내장동 쌍암리 대숲골공소, 입암면 등내공소, 북면 한교리 한교공소, 신월동 신성공소, 장명동 구량실공소가 생겨났다. 당시 블랑 신부는 “전라북도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교우가 살고 있으며, 이곳에서만 미사가 온전하게 거행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신심 깊은 교우들이 박해로 인해 죽는 것을 개의치 않고 그들이 신앙하는 하느님을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자랑했다.(블랑 신부가 1878년 11월 25일 뮈텔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 중)

국사봉 기슭에 자리한 반곡리는 태인현 남촌일변면 동막ㆍ옥천ㆍ여암ㆍ벌수ㆍ광신마을과 고현내면 만궁ㆍ세류ㆍ사리ㆍ진종ㆍ백화마을을 병합해 산세가 마치 소반을 닮았다 해서 서리실이라는 이름을 따서 ‘반곡’(盤谷)이라 했다. 동막(東幕)은 반곡리 석탄마을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경상도에서 박해를 피해 회문산으로 피신했던 교우들이 정착해 신앙 공동체를 이룬 교우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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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개 공예로 장식된 오래된 동막공소 제대가 이채롭다.


옹기 구워 생계 해결하며 선교에 힘써

이곳에 자리한 교우들은 옹기와 항아리를 굽고, 숯을 만들며 화전을 일구며 삶을 유지했다. 동막도 ‘독을 굽는 마을’이라는 데서 파생된 이름이다. 또 여옥마을 동쪽에서 보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쌓은 교우촌 돌담이 마치 막처럼 보인다 해서 동막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먹을 것이 늘 부족했던 교우들은 칡뿌리를 찧어 쑥과 풀잎 등을 섞은 개떡을 빚어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또 개간한 화전에는 서숙, 수수, 옥수수, 담배 등을 재배했고, 다락논을 만들어 쌀을 생산했다고 한다.

옹기와 항아리를 굽는 일은 많은 이의 품이 들어가는 고된 작업이다. 그러나 큰 밑천이 필요 없고, 지게에 옹기 한 짐을 지고서 남녀 교우들이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면서 팔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이문이 많이 남았다. 또 옹기 속에 교회 서적이나 성물들을 숨겨 여러 교우와 교우촌에 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옹기를 굽는 일은 교우들의 생계 해결과 선교에 효율적인 수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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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설립, 지금도 주민 모두가 교우

동막공소는 수류본당 주임 라크루 신부에 의해 1897년 설립됐다. 이후 해마다 봄, 가을에 신부가 방문해 판공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했다. 판공 때면 산길로 8㎞ 떨어진 오룡촌 학산공소를 비롯해 칠보, 수청리, 은석골 등지에 사는 교우 160여 명이 몰려 왔다고 한다. 하지만 동막공소는 설립 이래 60여 년간 공소 건물이 없어 주일마다 교우집을 돌아가면서 공소 예절을 했다. 6ㆍ25 전쟁 이후 동막 교우촌에서 약 1㎞ 떨어진 현 동막공소 자리로 마을을 옮겨 신촌(新村)이라 불렀다. 새 둥지를 마련한 교우들은 공소 건물을 짓기로 하고 당시 김재열(안토니오) 공소 부회장의 주선으로 목수였던 이종문(마티아), 이종섭(요셉), 이철호(마르코), 오삼봉(바르톨로메오)씨가 나서 6개월간 흙과 나무로 집을 지어 1957년 6월 공소 축복식을 했다. 이 흙집 공소를 30년간 사용한 후 1986년 벽돌로 새 공소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막공소는 지금도 주민 모두가 교우일 만큼 유서 깊은 교우촌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집집이 담도, 대문도 없다. 공소는 활기 넘치는 신앙의 안식처일 뿐 아니라 마을의 중심이다. 동막공소는 이러한 신앙의 모범으로 1987년 교구장 표창<사진>을 받기도 했다.

동막공소는 6ㆍ25 순교자뿐 아니라 여러 수도자를 배출했다. 동막공소 주변은 해방 이후 좌익 성향을 가진 이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삼례 출신으로 동막교우촌에서 살던 이인석(알베르토, 56)은 신심이 돈독한 교우였다. 그는 1951년 3월 18일 정읍군 태인면 오류리에서 체포돼 쌍치면 종암리로 끌려가 3월 21일께 처형됐다. 빨치산 활동을 하던 좌익이 열심한 천주교 교우인 그를 악질반동이라는 이유로 죽였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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