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눈] 특별한 만남 / 안봉환 신부[가톨릭신문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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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11-20 조회 3,606회본문
[신앙인의 눈] 특별한 만남 / 안봉환 신부
발행일2023-11-19 [제3368호, 23면]
지구 사제 모임이 끝나자 임실본당 신부님이 초대장을 살며시 건네주었다. ‘임실N치즈축제’ 기간 동안 본당에서 나눔 바자를 실시한단다. 로마 유학 시절에는 ‘고린내’ 나는 치즈를 먹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대한민국 최초 치즈 발상지’인 임실에서 생산되는 여러 종류의 치즈에 입맛이 상당히 길들여져 있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행사 기간을 피해 축제 마지막 날에 신자들과 함께 임실성당을 방문했다. 성당 입구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준 것은 1964년 임실본당에 부임한 이후 고(故) 지정환 신부님(1931~2019)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기록물이었다.
벨기에 태생인 그분의 본래 이름은 디디에 세스테벤스(Didier t’Serstevens)! 6·25전쟁 이후 한국이 너무 가난하여 한국인들을 도와주고 싶다며 자청하여 사제가 된 다음 이역만리 한국에 오셨다는 그분은 청춘을 불사르며 그 어떤 한국인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홀로 해내셨다. 그래서인지 한국과의 특별한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신 신부님은 가수 노사연씨의 ‘만남’을 무척 좋아하셨단다.
가난하고 척박한 임실에서 주민들과 치즈를 만들며 지역 발전과 주민의 삶을 윤택하게 한 그분께는 항상 ‘임실치즈의 아버지’, ‘장애인 가족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붙는다. 그분은 참으로 양떼를 섬기고 헌신한 양 냄새나는 목자였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11 참조) 하지만 시련과 고통도 뒤따랐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 가리라. 주께서 주셨던 것, 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공동번역 욥 1,21; 2,10ㄴ 참조)
식사 후에 성당에 들어가 기도하고 마당에 전시된 신부님 부임 당시 임실읍내 사진부터 치즈를 만드는 모습과 당시 치즈 모양, 공장을 짓는 모습, 임실치즈와 함께한 청년들, 치즈를 보관할 토굴을 파는 모습, 현 임실치즈테마파크 사진들을 꼼꼼히 챙겨보았다. 미처 알지 못했던 그분의 지난 날 업적에 새삼 부끄러워하는 신자들은 그분께 연신 감사를 드렸다. 처음 만난 천사 같은 비신자 자매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난생처음 성가리 상성마을에 있는 ‘치즈역사문화공간’도 방문했다. 그곳에는 작년에 복원된 그분이 최초로 세운 치즈공장도 있었다.
선물로 받은 산양 2마리로 시작하여 3년여의 실패 끝에 1967년 치즈 만들기에 성공한 신부님은 1968년 까망베르치즈와 1970년 체다치즈를 잇따라 성공적으로 생산하며 조선호텔과 신라호텔 등에 납품했단다. 젖소사육과 함께 조합을 육성, 치즈공장을 통한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면서 그분은 이익금을 주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했고, 1981년 치즈사업이 활발해지자 주민들이 직접 공장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한 다음 가방 하나만 든 채 17년 만에 그곳을 떠났단다.
“대한민국 치즈의 원조라는 브랜드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고 저의 신념이었고, 임실주민들과의 협동, 협력으로 같이 잘 살아보자는 공동체 정신과 희생, 열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던 신부님! 그 후 완주군 소양에서 1984년 중증장애인을 위해 ‘무지개의 집’을 설립해 한동안 그곳에서 봉사했단다. 사람들이 누려야 하는 권리를 제대로 모르고 지나치거나 삶이 너무 괴로워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갈 힘, 사람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하는 힘,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해 오셨던 신부님! 위령 성월을 맞이하여 모두에게 희망 바이러스를 선물하고 곁을 떠난 그분이 무척 그립다. “주님, 지 신부님과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사람들이 북적대는 행사 기간을 피해 축제 마지막 날에 신자들과 함께 임실성당을 방문했다. 성당 입구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준 것은 1964년 임실본당에 부임한 이후 고(故) 지정환 신부님(1931~2019)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기록물이었다.
벨기에 태생인 그분의 본래 이름은 디디에 세스테벤스(Didier t’Serstevens)! 6·25전쟁 이후 한국이 너무 가난하여 한국인들을 도와주고 싶다며 자청하여 사제가 된 다음 이역만리 한국에 오셨다는 그분은 청춘을 불사르며 그 어떤 한국인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홀로 해내셨다. 그래서인지 한국과의 특별한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신 신부님은 가수 노사연씨의 ‘만남’을 무척 좋아하셨단다.
가난하고 척박한 임실에서 주민들과 치즈를 만들며 지역 발전과 주민의 삶을 윤택하게 한 그분께는 항상 ‘임실치즈의 아버지’, ‘장애인 가족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붙는다. 그분은 참으로 양떼를 섬기고 헌신한 양 냄새나는 목자였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11 참조) 하지만 시련과 고통도 뒤따랐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 가리라. 주께서 주셨던 것, 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공동번역 욥 1,21; 2,10ㄴ 참조)
식사 후에 성당에 들어가 기도하고 마당에 전시된 신부님 부임 당시 임실읍내 사진부터 치즈를 만드는 모습과 당시 치즈 모양, 공장을 짓는 모습, 임실치즈와 함께한 청년들, 치즈를 보관할 토굴을 파는 모습, 현 임실치즈테마파크 사진들을 꼼꼼히 챙겨보았다. 미처 알지 못했던 그분의 지난 날 업적에 새삼 부끄러워하는 신자들은 그분께 연신 감사를 드렸다. 처음 만난 천사 같은 비신자 자매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난생처음 성가리 상성마을에 있는 ‘치즈역사문화공간’도 방문했다. 그곳에는 작년에 복원된 그분이 최초로 세운 치즈공장도 있었다.
선물로 받은 산양 2마리로 시작하여 3년여의 실패 끝에 1967년 치즈 만들기에 성공한 신부님은 1968년 까망베르치즈와 1970년 체다치즈를 잇따라 성공적으로 생산하며 조선호텔과 신라호텔 등에 납품했단다. 젖소사육과 함께 조합을 육성, 치즈공장을 통한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면서 그분은 이익금을 주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했고, 1981년 치즈사업이 활발해지자 주민들이 직접 공장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한 다음 가방 하나만 든 채 17년 만에 그곳을 떠났단다.
“대한민국 치즈의 원조라는 브랜드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고 저의 신념이었고, 임실주민들과의 협동, 협력으로 같이 잘 살아보자는 공동체 정신과 희생, 열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던 신부님! 그 후 완주군 소양에서 1984년 중증장애인을 위해 ‘무지개의 집’을 설립해 한동안 그곳에서 봉사했단다. 사람들이 누려야 하는 권리를 제대로 모르고 지나치거나 삶이 너무 괴로워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갈 힘, 사람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하는 힘,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해 오셨던 신부님! 위령 성월을 맞이하여 모두에게 희망 바이러스를 선물하고 곁을 떠난 그분이 무척 그립다. “주님, 지 신부님과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전주교구 문정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