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제87호(겨울) 신앙의 오솔길
본문
III. 대영광송*
하느님의 영광 : 하느님을 향한 기쁨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시편 96,1)
아주 오래전, 한밤중에 베들레헴 주변의 어느 목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몇몇 남자가 불을 쬐며 망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 주변에는 양들이 잠자고 있었고 모든 것이 고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루카 2,9) 그러자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기쁜 소식입니다. 참으로 큰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갈수록 흐지부지 되지 않고, 오히려 목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더욱 충만하게 했습니다. 그 기쁨은 밝은 빛을 내며 큰 울림을 주었고, 특히 고요와 어둠으로부터 울려 퍼졌습니다. 그때 수많은 천사가 밝은 빛을 내며 여기저기에 나타나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렇게 찬미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바로 이 순간을 세상은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고통스럽게 세상은 구원자를 고대하였습니까! 이제 그 구원자가 여기 계십니다. 마치 모든 피조물이 찬란한 천상의 소리로 이렇게 환호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이는 참으로 ‘새로운 노래’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영혼도 부르지 않았던 노래입니다.
세상의 구원자가 태어나셨던 그 밤에 처음으로 하느님께 올리는 이 노래는 구원을 참으로 기뻐하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이내 이러한 찬미가는 갑자기 멈췄습니다.
구원자는 시골에서 숨어서 사셨습니다. 아무도 그분에 대해 몰랐었고, 세상은 인간의 죄악과 오류 그리고 어리석음 등 무거운 멍에 속에서 계속 지냈습니다. 구원자는 성장하셨습니다. 그분은 가르치셨고 수난을 당하셨고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복된 구원을 기뻐하는 그러한 찬미는 울려 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33년이 지난 어느 날, 오순절에 남자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어떤 강당에 아주 조용히, 겁에 질려 많은 생각에 잠긴 채로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2-4)
하느님의 은총은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그들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행복에 가득 차 있었고, 자신들이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는 생각에 마음이 한껏 고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께 새로운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엄격하게 보였던 하느님은 이제 영광스러우신 분, 분명 두려우신 분이지만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감미로우신 분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기쁨 가운데 가장 큰 기쁨, 행복 가운데 가장 큰 행복이셨고, 이러한 모든 것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새로운 노래에 담겨 있습니다.
오순절만이 아닙니다. 성경, 곧 바오로 사도의 서간처럼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신앙인이 함께 모이고 또 성령께서 그들 위에 내려오시면, 그들은 열정적으로 하느님을 찬미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말은 가끔 알아듣기 어렵지만 그들의 영혼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온전히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 그것을 표현할 어떤 말도 찾을 수 없고 더듬거리기만 하는데, 이는 마치 어머니조차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웅얼거리는 아이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들의 찬미는 짧은 문장이나 한 단어 외에 달리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표현하려고 했던 바를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 하느님, 당신은 얼마나 위대하시고, 얼마나 영광스러우신지요!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교우 여러분, 그러한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하느님 영광을 비추어주는 새로운 선물에 대한 행복한 감동이 우리 안에는 더 이상 생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우시고 영광스러우시다는 새로운 발견에 대한 탄성과 기쁨을 우리는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 하나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미사의 ‘대영광송’입니다. 대영광송을 살펴봅시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 주님을 기리나이다, 찬미하나이다.” 여러분은 이 대영광송을 잘 들었습니까? 대영광송이 그 옛날 베들레헴에서 한밤중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에서 울려 퍼진 환호성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러한 환호성에서 이 대영광송이 비롯되고 드높여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대영광송은 실로 장엄하고, 위대하고, 엄청난 기쁨을 표현합니다. 대영광송에는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깊은 감동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벌떡 일어나 찬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대영광송은 갑자기 무언가 몹시 다급한 듯이 아주 짧은 문장으로 이렇게 열거합니다. “주님을 기리나이다, 찬미하나이다. 주님을 흠숭하나이다, 주님을 찬양하나이다. 주님 영광 크시오니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우시고 찬란하신 하느님에 대한 기쁨은 더욱 큰 환호성을 울립니다. 이어서 기도문은 조금 길어집니다. 이제 하느님을 향한 외침이 나오고, 그것도 그 외침의 단어들이 급하게 언급됩니다.
“주 하느님, 하늘의 임금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하나가 거론되면, 다른 것이 곧바로 들이닥칩니다. 자비도 간청됩니다. 그러나 ‘자비송’처럼 깊은 곤경에서 자비를 간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청은 변모하신 주님이 그토록 영광스러우시다는 기쁨과 환희에 깊이 잠기려는 간청입니다.
마침내 모든 것이 위대하고 웅장한 화음으로 어우러질 때까지, 영혼 전체가 활짝 열린 마음으로 모든 힘을 다해, 자신의 모든 사랑과 기쁨을 하느님 앞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 아멘.”
여러분은 대영광송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정신을 느끼셨나요? 초대교회에서부터 하느님을 찬미하는 마음을 느끼셨나요? 이러한 모든 것이 그 옛날 하느님을 찬미하는 열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아시나요?
대영광송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항상 의식했습니다. 교회는 이를 보석처럼 간직했고, 아주 드물게 곧 최상의 날에만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교가 대영광송을 노래할 수 있었고, 그것도 주일에 그리고 순교자 축일에 사용했습니다. 이에 비해 사제는 자신의 서품 기념일에, 대축일에, 부활대축일에만 대영광송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약 1천 년이 지난 다음에는 사제들에게도 주일에 대영광송을 노래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여러 가지가 크게 달라졌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그토록 위대하시다는 것에 대한 기쁨을 우리는 잊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일상의 신앙생활에서 누렸던 행복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에 그저 익숙해졌습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시다는 것이 통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늘의 신비를 알려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이, 영원한 유산이 형언할 수 없는 영광에 가득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아주 평범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마치 미지의 나라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그 나라를 발견하고 또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새롭게 발견할 때마다 그 발견은 그들에게 기적으로 다가왔고,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크게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그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이미 알려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놀라워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에 이미 익숙하게 되었고, 그 결과 새롭게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새롭게 발견하고 기뻐한다면, 오히려 이에 대해 우리는 놀랄 것입니다. 마치 노인이 꽃이 만발한 풀밭이나 햇빛 아래에 있는 나무를 보고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종교 안에서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말할 수 없이 찬란하신지를 설명하면, 우리는 그의 얼굴에서 그의 생각을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곧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의 죄를 없애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을 즐겨 듣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주 적은 사람들이 기쁨을 누립니다. 곧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삶을 탐구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것을 묵상하는 데에 기쁨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그분의 온 존재가 얼마나 초월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주시하는 데서 기쁨을 누릴 사람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욕심을 내어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그들에게 교회 안에서 제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교회의 공간과 종탑과 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교회의 축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거기에서 모든 말과 행동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설명하면, 지루하게 생각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기도’를 단지 ‘간청’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외에 다르게 기도할 줄 모릅니다. “사랑의 주님, 주십시오, 주십시오.” 기도가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요?
이제 대영광송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를 생각해 봅시다.
‘자비송’은 우리가 가련하고 나약한 피조물이며, 눈물의 골짜기를 걷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저 위에는 전능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계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다가가 온전한 신뢰로 간청하고, 끊임없이 간청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영광송’은 이러한 의미를 받아들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대는 간청만 해서는 안 됩니다. 간청은 종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그대는 하느님의 벗입니다. 그대는 가련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부유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저 위 하늘에 계신 찬란하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에 대해 그대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넓은 나라는 그대의 것입니다. 이에 대해 그대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그대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그대를 잊지 않으십니다. 계속 간청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이 그대를 잊을지도 모릅니다. 그분께 올바로 간청하십시오. 그분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위대하신지 그대가 알고 있음을 그분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분께서 그대에게 참으로 자비롭게 행동하셨다는 것을 그분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분께서 그대를 구원하셨음을 감사드리십시오. 그분이 우리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에 그대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시오.…”
푸른 초원과 높은 숲을 지나서 아름다운 시내를 건너는 등 무척 아름다운 대지를 걷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이런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이익을 계산하는 것 외에는 영광스럽게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예를 들어 “너도밤나무1)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목재를 주고, 초원이 짐승에게 얼마나 많은 먹이를 제공하고, 산길을 조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돌이 필요하며, 강은 얼마나 많은 선박을 오고 가게 합니까?” 하고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보시게, 그대의 머리에는 눈이 없고, 가슴에는 심장이 없습니까? 그대는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지 못합니까? 숲이 목재 공장인가요? 그대는 숲이 하느님의 경이로운 업적인지를 아직도 모릅니까? 주변의 모든 것이 어떻게 피고 향기를 내는지 그대는 알지 못합니까?”
우리는 그러한 사람에 대해 화를 낼 것이고, 우리의 태도는 아마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종교에서도 그렇게 똑같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느님께서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그분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셨던 것을 더 이상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얼마나 깊은지, 하느님의 경배가 얼마나 고결하고 진심 어린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간청하고 있습니다.
‘대영광송’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발 다르게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는 눈을 뜨기 바랍니다. 마음을 열고 그대 주변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그대가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의 영광을 깨닫기 위해서는 매 주일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주목하여 읽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해 기뻐하십시오.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기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릴 수 있다고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그 기쁨이 주어질 것입니다.
혹은 간혹 성가 책이나 미사 안내서를 읽으십시오. 그 가르침은 유익합니다. 신심과 미사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 위해 관련된 책들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대를 창조하셨고, 그대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고, 마침내 그대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대해 그대는 매일 저녁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아울러 주일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님을 진심으로 찬양하고 그분께 찬미를 드리십시오. 그렇게 하는 방법이 있나요? 성가 책에는 가장 아름다운 찬미 노래와 찬양 노래가 있습니다.
성가를 부르십시오. 성가 책을 손에 들고 마음을 다해 “위대하신 하느님,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하고 기도하십시오. 천천히 그리고 그 내용을 음미하며! 그러면 찬미하는 마음이 어떻게 높여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혹은 부활에 관한 찬란한 찬미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해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혹은 이렇게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하느님은 제 마음과 행동과 손으로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저는 저의 하느님을 매 순간 찬미하고 경배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노래,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노래, 성사에 관련한 성가와 그 밖의 많은 성가를 부르십시오. 거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가 있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계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십시오!” 하고 ‘대영광송’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하신 일로 저를 기쁘게 하셨으니 당신 손의 업적에 제가 환호합니다. 주님, 당신의 업적은 얼마나 위대하며 당신의 생각들은 얼마나 깊습니까!”(시편 9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