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

글모음

SNS 공유하기

쌍백합 제86호(가을) 신앙의 오솔길

본문

*  『쌍백합』  제85호에 이어  ‘미사성제’에 대한 로마노 과르디니의 강론 연재 전문, 두 번째 ‘Ⅱ. 자비송’입니다. 

 

 

ii.자비송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신 분

그 자비 당신의 모든 조물 위에 미치네.”(시편 145,9)

 

고대 교회는 수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에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의 고난을 묵상했습니다. 수요일에는 유다의 배반을 기억했고, 금요일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어지는 토요일에는 주님이 무덤에 묻히시어 그분 교회가 볼 수 없도록 가려졌음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일들에 신자들은 오후 3시인 저녁기도 시간까지 단식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일들에 로마의 거리를 지날 경우, 신자들이 일정한 교회에 모여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교황도 함께 모여 있었는데, 신자들은 모두 그 교회에서 출발하여 도심을 지나 다른 특정 교회까지 행렬하였습니다. 행렬 중에 신자들은 ‘호칭기도Litanei’를 노래했습니다. 부제가 우렁찬 목소리로 장엄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모든 회중이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응답했습니다. 이렇게 큰 소리로 노래하면서 그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어 교황은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려고 준비했습니다. 또다시 회중 가운데에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교황이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회중에게 조용히 하라고 표현할 때까지 그 탄식은 계속되었습니다.

회중이 한편으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의 아픔과 자기 삶의 곤경에 짓눌린 마음을 추스르는 가운데 최상의 목자와 함께 도심을 순례하면서 하느님께 재차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절실하게 부르짖었던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거룩한 탄식과 의탁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불안이 녹아 있습니까! 곧 나라와 도시의 운명에 대한 걱정 혹은 자기 삶의 크고 작은 관심사에 대한 걱정을 얼마나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까! 이런 관습은 중세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교황이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8개월 동안 로마에서 멀리 피신했을 때, 이 엄숙한 관습은 사라졌습니다. 순례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고, 호칭기도도 바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도 모든 미사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곧 ‘자비송Kyrie elesion’이 남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제가 생각하기에, “주님, 크나큰 곤경 중에 있는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이 기도는 인간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고, 따라서 인간의 올바른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크림전쟁(1853-1856)이 끝났을 때, 당시 위생 제도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감무쌍한 여인이 격전지에 나타나 하얀 돌로 십자가를 세우고, 아주 겸손하게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의 현장이 너무 참혹하여 오직 한마디 말, 곧 자비송의 그 거룩한 한마디만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깊이 들여다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눈물의 골짜기라는 옛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시 체험합니다. 우리의 지구는 정말로 하나입니다! 요즘 우리는 현실에서 고통이 축적되어 두 배의 힘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고통은 항상 현존합니다. 때때로 고통은 집에서 그리고 닫힌 방에서,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진 채 아주 고요하게 존재합니다. 고통은 항상 그렇게 있습니다.

인간은 종종 교만하여 자신이 참으로 가련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돕고 싶어 하고,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하기를 바라고,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외적으로 이를 악물고 아무리 굳건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의지할지라도, 마음속으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부르짖습니다.

 

이는 이제 무어라 해도 별수가 없습니다. 이를 거창한 말로 숨기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신적 존재가 아니라 가련한 피조물입니다. 우리 주변의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곤경이 잇달아 우리를 덮칩니다. 다른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동안에 우리는 그 곤경을 어느 정도 견디어 냅니다. 그러나 오래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견디어 내는 힘이 갈수록 부치는 것을 느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에게 달려갑니다. 이것은 비겁한 것도 끔찍한 것도 아닙니다. 단순한 진실입니다. 아무리 수려한 미사여구도 이 진실을 가리는 일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가련하고 나약하며, 우리를 돕는 분이 필요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의지할 것을 붙잡는 것처럼, 곤경 중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밉니다. 그렇게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입니다. 그분은 모든 고통, 모든 곤경, 세상의 모든 힘보다 더 강한 분이어야 합니다. 그분은 곧 하느님, 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이제 ‘전능하신 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 생각해봅시다.

강에서 홍수와 겨루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그 강물의 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약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물결의 힘은 그 자신보다 더 강합니다. 여기에서 강 전체의 위력을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바다물결이 해안을 덮치고 가끔은 해안을 파괴하는 그 엄청난 세력을 생각해봅시다. 

또한 자연의 다른 모든 위력, 폭풍, 번개, 화산 등의 위력을 생각해봅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하느님께 대항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과 천체의 세력은, 우리가 이를 묘사한다면, 숨이 막힐 정도로 위대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천체의 웅장함, 태양의 엄청난 열기…,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은 하느님을 결코 거역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연약한 작은 모기가 우리 인간에게 달려들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모든 것은 그분의 권능 안에 있을 뿐입니다. 마치 작은 딱정벌레가 우리 손안에 있듯이 말입니다.

여기에 아픈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 꺼릴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매우 강하고 활력에 넘쳤습니다. 이제 불행이 그에게 덮칩니다. 그는 불행이 자기 자신 안에 자리 잡은 것을 느끼고, 이에 무력하게 됩니다. 그는 강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육체를 파괴하는 그 미생물에 무력합니다.

여기에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늘 자신감에 넘쳐있고 뭔가를 기쁜 마음으로 창조했습니다. 그는 점차 자신의 성공을 느끼고 인생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행이 들이닥쳐 그는 절망하게 됩니다. 절망이 마음속에 돌처럼 내려앉아 그의 마음은 무거워집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겨울 따름입니다. 이는 분명 우리 인간이 저항할 수 있는 세력입니다. 이러한 저항을 위해 인간에게는 의지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저항하는 데에도 인간은 무척 연약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에게 질병과 죽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울증, 고뇌 등은 그분에게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만물의 주님이시고, 절대적인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질병을 당신의 뜻대로 다루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원하실 때마다 인간의 영혼을 담대하고 강하며 기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껏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여러 계획을 세웠지만, 그 계획들이 갑자기 다른 것들로 인해 어긋나는 것을 겪어야 했습니다. 운명이 그를 거스르고 불행이 덮쳐 그는 자신의 계획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에 맞설 인간의 힘은 종종 무력합니다. 인간은 저항하고 싸울 수 있지만 때때로 굴복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주인이십니다.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잠언 21,1)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백성과 국가의 의지는 그분에게 대항하는 아이의 힘 같으며, 종종 이겨낼 수 없는 장벽인 우리의 운명은 모두 순전히 그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자연의 모든 세력, 질병과 죽음의 모든 세력,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모든 세력, 인간과 민족과 운명의 모든 세력 등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은 그분께 복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무엇을 뜻할까요? 여러분은 거대한 제철소나 항만 시설에서 크레인의 운전자가 레버를 조종하여 거대한 짐을 들어 올려 방향을 바꾸어 원하는 곳에 내려놓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약간은 걱정스러우면서도 감탄하는, 자랑스럽고 자유로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또는 어떤 장군이 거대한 계획을 세워 수백만 명의 군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총기, 기계, 온갖 종류의 기구 등을 하나의 목표를 향해 사용하고, 많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이 목표를 확고하게 고수하고 계속 추구해 나간다면, 이것도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이런 무시무시한,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어떤 것을 위대하게, 더 위대하고, 더 거대하게, 더 엄청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표상이 우리 정신의 한계를 넘어서기에 우리가 내적으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단지 하나의 숨결, 희미하고 나지막한 예감과 같다.”

옛 서적에서 저는 하느님에 관해 읽은 적이 있는데 참으로 무서우신 분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힘은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경솔하고 사려 깊지 않은 사람들을 진지하게 대하고 그들을 상상해 볼 때 우리가 내적으로 움츠리고 몸서리치는 것처럼, 그분의 권능은 정말 두렵습니다.

 

우리가 도움과 자비를 간청한다면, 바로 이러한 하느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그분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서 그분이 과연 도와주실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어떤 미혹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많은 사람에게는 위대하게 보입니다. 반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계시고, 어렴풋한 분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곧 하느님이 이러한 모든 폭력, 번개, 폭풍, 수력, 질병과 마비, 불행과 곤경 등에 대해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물이나 사건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적절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그렇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세상은 우리에게 늘 작아지고 하느님은 항상 위대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다음 물음을 거의 오만불손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느님이 도와주실 수 있는가? 거미가 그물에 걸린 파리를 죽이기를 원할 때 인간이 그 파리를 도울 수 있는가? 그분은 하실 수 있는가? 하지만 그분도 원하시는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제기됩니다. 우리는 가끔 삶에서 기묘한 일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곧 부자는 마음이 완고하고 인색하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체험했습니까! 권력자들이 작은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힘센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연약한 사람과 병자에게 무자비하다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에게서도 그렇지 않겠는가 하고 우리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돌보시는 데에 관심도 시간도 즐거움도 없다고 어떤 사람은 이미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분은 그렇게 강하고 그렇게 힘이 있는 분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어떤 부자가 인색하다면, 그는 참으로 올바른 부자가 아닙니다. 그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는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이 그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불안에 떱니다. 그는 자기 소유물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참된 부자는 영혼이 부유하고, 기꺼이 베풀고, 돈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돈에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돈을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그리고 어떤 강한 사람이 무자비하다면, 그는 참으로 나약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약한 사람을 돌본다면 자신의 목적을 상실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불안에 떠는 것입니다. 그는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자신의 용기와 결정에 손해가 된다는 생각에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강하시기 때문에 모든 나약한 사람을 받아들이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힘이 세시기 때문에 모든 곤경을 돌보는 것이 당신에게 큰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선하시고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관대하시고 자비로우실 정도로 강력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하시기에, 그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자비롭고 양순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곤경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에게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울러 이제 우리가 아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필요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강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지상의 세력보다 강력하시고, 모든 고통보다 더 강하시기에, 정말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그분이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동정심이 많으시다는 것을, 그래서 기꺼이 도와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의 오래된 기도 곧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기도한다면, 이 기도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시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자비송은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곧 자비송은 모든 시대를 걸쳐 세상 전체를 가득 채운,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엄청난 고통이 실제로 있음을 우리에게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이 자비송은 모든 인간에게 자신을 도와줄 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자비송은 하느님이 바로 그런 분이심을, 하느님이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임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비송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자비송을 몇 번이나 바치는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한 번이 아니라 아홉 번을 바칩니다(역주-이전에는 미사 때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아홉 번 바쳤지만, 전례개혁이 이루어진 지금은 여섯 번 바친다). 계속하여 아홉 번을 기도드립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요?

여러분은 예수님이 비유 하나를 들려주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루카 11,5-13 참조)어떤 사람이 늦게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먹을 것이 집에 없어서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때는 한밤중이었습니다. 친구는 창문을 내다보며, “도대체 무슨 일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빵을 달라는 요청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줄 수가 없네. 벌써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나 그 사람이 돌아가지 않고 계속 문을 두드리며 졸라댑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집주인은 그 남자의 집요한 간청 때문에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5 이하)

 

이어서 주님은 여러분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그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놀랍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하느님이 주시지 않는다는 것도 언급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청하고, 또다시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귀찮아하실 정도로 계속 청해야 합니다. 

자비송처럼 곧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반복하여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일어나서 주실 때까지 청해야 합니다.

주님이 들려주신 이 비유와 자비송은 같은 가르침을 줍니다. 곧 청하는 사람은 오랜 시간을 청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가난한 인간이 당신 앞에서 청하는 것을 보는 것은 하느님께 기쁨이 되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간혹 우리의 소망은 변덕스럽습니다. 소망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약해지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다른 많은 소원은 선하고 올바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소원은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하고, 이는 오랜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소원은 신뢰로 입증되어야 하고, 이는 오랜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기도는 하느님의 선물을 받는 데에 영혼을 준비시킨다고 합니다. 모든 간청은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인간이 종종 간청하게 하시고, 오랜 시간 간청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영혼이 불필요한 소원을 내려놓고, 그 영혼이 신뢰로 튼튼하게 되어 선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합당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자비송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아주 중요하고 거룩한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가르침을 따르십시오. 곤경 중에서 여러분은 온전한 신뢰로 하느님께 다가가십시오. 그분에게는 여러분을 도울 수 있는 권능이 있으며, 또한 그분은 여러분을 기꺼이 돕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자비송의 가르침처럼, 여러분은 완전히 단순하게 그리고 확고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는 길게 그리고 자주 기도하고, 자비송처럼 또다시 반복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님이 주실 때까지 여러 번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그분이 주시지 않더라도 우리는 최소한 다른 뭔가를 얻었을 것입니다. 곧 영혼이 고요해지고,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그 현존만으로 만족하고 포기하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영혼이 간청한 바를 얻어 누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입니다. 하느님이 여러분의 구원에 필요하지 않은 무언가를 포기하도록 여러분에게 힘을 주시는 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위대하신 자비로운 행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