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제90호(가을) 신앙의 오솔길
본문
VI. 봉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의 목적이시다
(선한 목적)
로마노 과르디니 지음
김선태 주교 옮김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묵시 4,11)
초대교회의 집회를 생각해 봅시다. 당시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미사성제를 거행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날 ‘자비송’으로 남게 된 리타나이Litanei가 지나고, ‘본기도’가 끝났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발췌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에 대한 주교의 ‘강론’도 끝났습니다. 그러면 주교의 봉사자는 회중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죄인들과 세례를 받지 않은 자는 이 자리를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해당하는 회중은 주교 앞에 나아가 축복을 받고 집회를 떠납니다. 이로써 말씀의 전례Vormesse가 끝나고, 주님의 엄밀한 기억인 성찬의 전례가 시작됩니다.
이제 아름다운 모습이 펼쳐집니다. 회중이 아무 말 없이 깊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신자들이 제단 앞으로 나옵니다. 먼저 남자들이, 이어서 여자들이 하얀 천 위에 놓인 제물을, 곧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고 다른 것들도 봉헌합니다.
이에 사제들도 동참하고, 거기에 있는 주교도 동참합니다. 각자는 자기 빵을 봉헌합니다. 부제는 제물을 받아 가지런히 정리합니다. 그런 다음 거룩한 미사를 주례하는 사제나 주교는 부제의 도움을 받아 거룩한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곧 빵과 포도주를 받아들입니다. 나머지 제물은 사제와 가난한 사람의 생계를 위해 사용합니다.
이렇게 각자가 자신의 제물을 봉헌하는 방식은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많이, 또 어떤 사람은 적게,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 거룩한 제사를 위해 봉헌하고 또 형제들의 생계를 위해 봉헌합니다. 좋은 제물보다 더 고귀한 것은 봉헌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입니다.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한 올곧은 사랑으로 바치는 마음은 실로 중요합니다. 각자는 자신의 것을 바치되, 자신의 사랑을 바치는 것입니다. 좋은 제물과 더불어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봉헌됩니다.
형제 여러분, 이것이 바로 제물 준비alte oblatio였습니다. 신자들의 이러한 봉헌 행위는 지금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헌금함에 넣는 봉헌 그리고 미사 지향과 함께 바치는 예물,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제단 앞으로 나아가는 봉헌 행렬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전처럼 지금도 신자들은 사제의 손을 통해 천상의 임금님께 거룩한 제물로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고, 자기 자신도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로 바칩니다.
신자들은 더 이상 제단에 나가지 않습니다. 사제는 성작과 빵을 들고 성찬례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봉사자는 포도주를 사제에게 건네줍니다. 그러나 사제는 그것을 봉헌할 때, 기도문에 표현되어 있기를,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있는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신자를 위해 그렇게 행합니다. 먼저 그는 빵이 놓여 있는 금색 성반을 받아 높이 올립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올려다본 다음 눈을 드리운 채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 받아주소서.” 그런 다음 제병을 내려놓고 십자 표시를 합니다.
이어서 그는 제단 오른쪽으로 가서 포도주를 성작에 붓고, 아주 깊은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물 몇 방울을 섞습니다. 이때 사제는 포도주에 물 몇 방울이 섞인 것처럼 우리 자신이 강생하신 분의 신성에 참여해 달라고 기도드립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잔을 제단 가운데로 가져와 다음과 같은 기도로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주님, 구원의 잔을 당신께 바칩니다.” 사제는 잔을 내려놓고 다시 십자 표시를 합니다. 그리고 몸을 숙이고, 제단에서 겸손한 동작으로 팔을 벌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겸손한 정신으로, 부서지는 마음으로 비오니 저희를 받아주소서. 당신 앞에서 드리는 저희의 제사가 오늘 주 하느님이신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그리고 사제는 몸을 일으켜 팔을 벌리고 이런 말로 잔과 빵을 축복합니다.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 오시어 당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준비된 이 제물을 축복하소서.”
이어서 사제는 손을 씻습니다. 이는 그가 조금 전 제물을 받아들였을 때 손이 더럽혀질 수 있었던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사제는 제단 한가운데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합니다. 그런 다음 돌아서서 신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이 제물을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기꺼이 받아주시도록 기도합시다.” 봉사자들은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응답하고 사제는 ‘아멘’이라는 말로 확인합니다. 잠시 침묵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제물 준비는 끝납니다.
오늘날 모든 것은 이전보다 더 엄격해졌습니다. 회중은 제단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습니다. 사제가 모든 것을 행합니다. 하지만 내용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곧 모든 회중은 사제와 한마음이 되어, 지존하신 주님께 자신의 제물을 봉헌하여 거룩한 제사에 사용할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제물과 함께 자기 자신도 봉헌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주님께 바치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아름다운 봉헌 행위는 간결하지만, 그 내용은 아주 풍요롭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봉헌 행위는 살아 계신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봉헌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이런 행위에 동반하는 기도는 진지하고 장엄합니다. 그 깊은 내용은 계속되는 거룩한 제사를 통해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분의 영광은 이미 거기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사제는 제병과 함께 성반을 들어 높임으로써 이미 ‘흠 없는 희생제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물과 포도주를 혼합함으로써 “이 물과 포도주의 신비”에 대해 말합니다. 교회는 잔을 ‘구원의 잔’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성변화를 전제하고, 그 변화에서 완성됩니다. 우리가 이제 우리 자신과 제물을 마련한 거룩한 제사와 만찬에서, 우리 자신을 기꺼이 바치려는 우리의 의지 또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받아들여집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버지께 데려가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의 목적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영광의 영원한 임금이신 그분께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그분은 그러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근원이시며 목적이십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곧 세상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지, 얼마나 선하시고 부유하신지, 얼마나 아름다우신지를 선포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창조주를 실제로 찬미합니다.
세상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도록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성경이 말하듯이, 하느님의 ‘발판’(이사 66,1 참조)이며, 하늘은 하느님의 어좌입니다. 피조물은 아무리 위대하고 광대하고 아름다울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통해서만 그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피조물이 하느님에게서 독립하려 시도한다면, 이는 마치 거울 속 이미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는 나를 들여다보는 얼굴이 필요 없다. 나는 얼굴 없이도 있을 수 있다.” 사람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을 멈추는 순간, 그의 모습도 사라져 버립니다. 하느님께서 더 이상 이 세상에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시지 않는 순간, 세상도 무無가 되어 버립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위대함과 위엄을 반영하는 거울보다 더 위대하고 더 영광스럽게 될 수 없습니다. 광활한 하늘은 하느님께서 무한하시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 찬란한 태양은 하느님의 영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알립니다. 어두운 밤은 하느님의 신비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다는 것을 알립니다. 거대하고 깊은 바다는 하느님의 힘이 거역할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향기로운 꽃들은 하느님께서 좋으신 분임을, 모든 개념을 뛰어넘을 정도로 좋으신 분임을 선포합니다. 수많은 동물은, 곧 뛰어다니고 날아다니고 헤엄치고 기어다니는 모든 동물은 수십만 개의 합창으로, 위대하신 하느님은 무한히 부유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노래합니다.
세상은 인간을 위해서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너무 왜소하고, 너무 가련하고, 너무 나약하여 그럴 수 없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이 인간에게 봉사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자기 집의 기구들을 하인들에게 맡겨 그 하인들이 일을 하게 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하인들이 그 기구들을 사용한다면, 그 기구들이 자신을 위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인들과 기구들은 모두 주인에게 봉사합니다. 이는 세상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세상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과 우리는 모두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는 영광을 드립니까?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옥좌에 앉은 장로들처럼 영광을 드립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분 앞에 우리의 왕관을 내려놓음으로써 영광을 드립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분을 섬기기 위해 우리의 존재와 소유들을 그분께 바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인식하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분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당신의 영광을 위해 활동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이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원합니다. 반드시 그러해야 하고, 그것은 옳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태양과 별들, 광활한 하늘, 산과 바다와 모든 땅, 지상에서 살아 있고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 존재하고, 아울러 우리 자신도, 육신과 영혼, 우리의 모든 생각과 의지, 우리의 고난과 기쁨 등 그 모든 것도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오직 당신만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실 자격이 있습니다. 권능과 영예와 영광을 받으실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 가장 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며 위대하신 분, 만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종교이며, 이것이 바로 믿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세상이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자신이 세상 안에 살고 있고 세상에서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세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내적으로 이렇게 확신합니다. 세상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됩니다. 그분만이 위대하시고 전능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 위대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세상이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그가 정신으로 이 세상의 신비와 운명을 이해할 수 있고, 자유의지와 신앙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이러한 경배를 주님께 바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직무이며, 인간의 위대한 존엄성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세상의 중심이며, 세상의 심장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찬양이 인간의 입을 통해 가장 높은 옥좌로 올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예물준비가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가장 지존하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시며, 모든 영예와 흠숭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은 한 분뿐이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만물은 그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대도 그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대가 그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를 바란다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바랍니다. 그대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을 바라볼 때, 사제와 하나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유와 재화, 우리의 집, 우리의 일, 우리 직업, 그 안에 있는 배우자와 자녀, 부모와 형제자매, 우리의 몸과 영혼,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 우리를 억압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지존하신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일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선한 의도로 모든 것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봉헌해야 합니다.
아침에 기상할 때 우리의 첫 생각은 이러해야 합니다.
“주님, 오늘의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 있습니다.” 우리가 아침기도를 드릴 때, 희생이 부족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루를 영적으로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오늘 행하는 모든 것과 나에게 일어난 모든 것은, 주님,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하느님께 대한 생생한 찬양으로 봉헌됩니다.
물론 낮에도, 일하는 중에도 더 자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을 시작할 때 “주님, 이 일은 당신을 위한 일이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일은 하느님을 위해 거룩한 일이 되고, 우리에게는 쉬운 일이 됩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주님, 당신을 위해 이것을 짊어지겠습니다.” 하고 말하면, 그 일이 그분의 손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공할 때 “주님, 이는 저의 영광이 아니라 당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옵니다.” 라고 말하면, 이는 허영심을 극복하게 도와주고, 우리를 겸손하게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는 항상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이렇게 행동한다면, 우리의 삶은 올바른 질서를 갖추게 되고, 모든 것은 제 자리를 찾고, 영광을 마땅히 받아야 할 주 하느님께 모든 영광이 돌아갈 것입니다.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묵시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