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제85호(여름) 신앙의 오솔길
본문
I. 계단 기도 *
가장 순수하신 하느님 : 마음의 준비
“서원을 하기 전에 자신을 준비시켜
주님을 떠보는 인간처럼 되지 마라”(집회 18,23).
1.사제가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제단에 나갈 경우, 우리는 그가 먼저 몇 가지를 준비하는 모습을 볼 것입니다. 그는 성작을 제자리에 놓고 미사 경본을 폅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미사에 속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장엄미사 때에는 사제가 아니라 그의 봉사자인 부제가 이것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미사가 실제로 시작되면, 우리는 어떤 특별한 것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사제가 이제 곧바로 제단에서 거룩한 행위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제단 아래에 내려와 한동안 머물러 있습니다. 그가 거기에서 한동안 기도하는 것을, 그것도 겸손한 태도로 아주 진지하게 기도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사제는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람들이 대부분 생각하기를, 사제가 제단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제는 두려워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한동안 아래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는 어떤 악행도 행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진정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면전에서 거룩한 제사를 봉헌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지금 그것을 원합니다. 그는 하느님께 나아가 그분을 부르기를 원합니다. 이때 교회는 사제를 잠깐 정지시키면서 그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정녕 그대가 행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그대가 부르려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거룩한 하느님을 부른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대는 무한하신 하느님을 ‘주님’으로 부르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러기에 사제는 서 있는 채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마음을 준비합니다. “서원을 하기 전에 자신을 준비시켜 주님을 떠보는 인간처럼 되지”(집회 18,23)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2.하느님께서도 친히 교회처럼 그렇게 행동하셨습니다. 곧 그분은 갑자기 당신께 나아오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잠깐 ‘정지’시키셨습니다. 그 옛날 호렙산에서 모세는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불에 타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았을 때, 서 있는 채로 그 광경을 여러모로 숙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는 보시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고, 주님께서 이르셨던 대로 행하였습니다(탈출 3,1-6 참조).
교회도 그렇게 행합니다. 교회는 제단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제에게 말합니다. “이곳은 거룩한 땅이니 이리 가까이 오지 마시오. 그대는 하느님과 이야기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먼저 그대 자신을 성찰하시오. 하느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시오. 그대가 과연 그분과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지 그대에게 물어보시오. 그대 자신을 준비시켜 하느님을 떠보는 인간처럼 되지 마시오.”
3.하느님은 누구십니까? 하느님은 순수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히 순수하신 분입니다. 죄 없이, 불완전함 없이, 아주 작은 결점의 기색도 없는 순수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그분과 이야기를 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아마 겨울에 막 내린 눈밭에서 산책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눈밭은 우리의 마음을 기묘하게 사로잡을 정도로 아무도 손대지 않았고, 흠 없이 깨끗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더러운 신발로 그 깨끗한 곳에 들어서는 것을 주저하였고, 그래서 그곳을 우회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는 깨끗한 것을 경외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혹은 우리는 정말 순수함을 지닌 귀한 사람을 만났던 행복을 누린 적이 한 번쯤 있을 것입니다. 분명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순수한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의 외면과 내면, 말과 용모, 태도와 얼굴과 눈빛 등이 깨끗하고 순수한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도 분명 고민하고 번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죄를 단호하게 멀리합니다. 그의 내면은 단호하여 모든 힘으로 그 죄악을 물리칩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하는 것을 대부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에게서 당혹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두려움을 느낍니다. 마음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너는 정말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너는 그와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은 약한 비유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본다면, 이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분 앞에서는 천사도 어둡고 흠 있게 보일 정도로 그분은 깨끗하십니다. 그분은 선을 행하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선이십니다. 그분은 선 자체이십니다. 선하게 있는 것은 하느님처럼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악하게 있다는 것은 하느님과 다르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친히 선이십니다. 그리고 선한 모든 것은 단지 하나의 낌새, 곧 그분의 무한한 선과 깨끗함을 드러내는, 그것도 빈약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낌새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악을 얼마나 미워하시는지요! 우리는 거친 짐승을 만날 때 참을 수 없이 싫어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비겁한 행동을 저지른다면, 이를 혐오합니다. 가장 순수하신 하느님은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겠습니까! 가장 깨끗하신 하느님은 그것을 얼마나 멀리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은 순수하십니다. 두렵고 가까이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하십니다. 깨끗한 눈의 하얀색은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계속 눈밭을 걸으면, 그 백색은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합니다. 그래서 자기 눈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태양의 밝은 빛은 분명 쾌적함을 주지만, 우리가 그 빛의 근원, 곧 빛이 충만하게 쏟아지는 태양 자체를 바라보면, 우리의 눈은 상할 정도로 그 빛이 강렬합니다. 하느님의 깨끗함도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깨끗함은 형언할 수 없이 순수하며, 우리를 두렵게 할 정도로 우리의 모든 개념을 뛰어넘을 정도로 위대합니다. 그 깨끗함은 작열하고 눈이 부시고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련한 죄인인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가 그분과 이야기하기를 바라면, 우리의 죄스러움은 영혼에 참으로 가책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모세처럼 두려움을 느낍니다.
4.이 때문에 교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원을 하기 전에 자신을 준비시켜라.” 죄인인 그대가 무한히 순수하신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그대는 먼저 그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라는 것입니다.
사제가 제단의 계단에 서서 경건한 자세로 ‘계단기도’를 바칠 때, 그는 이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가까이 살펴봅시다. 사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곧바로 엄위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생각이 그 영혼에 미칩니다. 사제는 마음을 가다듬고, 가까이할 수도 없고 형언할 수도 없는, 엄위하시고 순수하신 하느님 앞에서 “저는 하느님의 제단에 나아가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분께 그런 말을 하는 그는 누구입니까? 과연 그분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사람입니까? 이어 사제는 깊은 생각에 잠기어 자기 자신을 이렇게 점검합니다. 곧 그는 주님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제단에 나가 하느님을 찬미해야 한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그러기에는 자신이 참으로 부당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마침내 그는 여기에서 홀로 도움을 베풀 수 있는 분께, 곧 하느님께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를 결심합니다. 시편 43편은 사제가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점검하는 내용입니다. 그 시편을 읽으면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면서 하느님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지, 곧이어 어떻게 자기 죄를 극복하는가?’ 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다시 용기를 얻습니다. 하느님께서 결국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시편 전체의 내용은 주님께 대한 신뢰로 끝을 맺습니다.
“하느님, 제 권리를 되찾아 주소서. 충실치 못한 백성을 거슬러 제 소송을 이끌어 주소서. 거짓되고 불의한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시편 43,1). 이 말씀으로 사제는 자신의 마음을 모읍니다. 그는 곧 모든 것에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죄와 악행에서, 하느님을 거역하는 전도된 모든 충동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시라고 간청합니다. 이제 그는 하느님만을 바라봅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피난처이십니다”(시편 43,2 참조). 그분은 강하시고 순수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즉시 자신을 있는 그대로 곧 나약하고 죄 많고 흠이 있는 존재로 느낍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자기 자신을 멀리하시고 버리시는 것처럼 느낍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제가 원수의 핍박 속에 슬피 걸어가야 합니까?”(시편 43,2) 의심할 나위가 없이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그렇게 느낍니다. 하느님께 낯설고, 멀리하여 있고, 비참하게 느낍니다. 마치 항상 악한 원수가 승리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계속 말합니다. “당신의 빛과 당신의 진실을 보내소서. 그들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그들이 저를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시편 43,3). 이것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곧 인간이 하느님께 다가가 청하는 것, 그분이 당신의 순수하고 거룩한 빛을 마음속에 부어주시고,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시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곧바로 언급되듯이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 사제는 이미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비파 타며 당신을 찬송하오리다”(시편 43,4). 그러나 사제의 영혼에는 다시 죄스러운 생각이 무겁게 듭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어찌하여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사제는 다시 다음 신뢰를 확신할 때까지 그렇게 신음합니다.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시편 43,5).
따라서 이것이 바로 사제의 태도입니다. 곧 사제는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죄스러움을 바라보고, 하느님 앞에서 가련하고 당황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5.이제 곧바로 두 번째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사제는 곧 온전한 신뢰로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고백합니다.
“우리의 도우심은 주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시편 124,8). 사제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향해 몸을 깊이 낮추며, 아주 오래되고 엄숙한 죄의 고백 기도를 바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이것은 공개적인 고백입니다. 모든 사람이 듣습니다. 하느님, 마리아, 천사들, 천국에 있는 위대한 성인들, 그리고 신자들도 듣습니다.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단 한 번이 아니라 많이, 셀 수 없이 많이, 그것도 가벼운 죄가 아니라 큰 죄를 지었습니다. 여기서 사제는 변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잘못을 범할 마음이 없었고, 그 잘못은 다른 사람의 탓입니다.”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이는 무겁고 크나큰 죄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하고 올바른 통회입니다. 그리고 그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 곁에서 자신을 도와주는 전구자를 찾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그리고 이런 응답을 듣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이것이 사제의 두 번째 자세입니다. 그는 자신을 성찰하며 죄를 찾아내고, 깊은 통회와 함께 하느님께 잘못을 고백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그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6.이제 사제의 세 번째 자세는 하느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올바로 기도하고, 거룩한 행위를 올바른 방식으로 거행하는 힘과 은총과 도움을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뢰로 그는 하느님께 향합니다.
“하느님 저희에게 오시어 새 생명을 주소서. 그리하여 당신 백성이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의 은총을 저희에게 보여주시고, 당신의 구원을 주소서.”
이제 사제는 계단 위로 올라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께 구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한 마음으로 미사성제에 임하게 하소서.”
7.형제 여러분, 이것이 바로 교회가 사제에게 거룩한 제사를 합당하게 거행하도록 지시하는 준비입니다. 사제는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하느님이 누구이시며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도와주시고 비추어주시어, 자신의 직무를 올바르게 이행하도록 힘을 주시라고 청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원을 하기 전에 자신을 준비시켜 주님을 떠보는 인간처럼 되지 마라”(집회 18,23). 자신의 마음을 준비하는 일, 여기에서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이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세 가지 자세입니다. 첫 번째는 자기 마음과 양심을 점검하고 성찰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 자세는 잘못한 것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일입니다. 세 번째 자세는 하느님께 올바로 기도하는 은총과 힘을 간청하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사제에게 필요하고, 우리 평신도 각자에게도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거룩한 미사를 위해 성전에 온다면, 여러분 각자에게도 다음 말씀이 해당됩니다. “서원을 하기 전에 자신을 준비시켜 주님을 떠보는 인간처럼 되지 마라”(집회 18,23).
여러분은 갑자기 성전에 와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고, 이어 하느님께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세에게 가까이 오지 말고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던, 그 두려울 정도로 순수하신 하느님께 크고 작은 죄를 지은 우리가 과연 가까이 나갈 수 있습니까? 교회는 여러분에게도 마음을 준비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사제처럼 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정확한 시간에 거기에 있도록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여러분에게 이렇게 물으십시오. ‘나는 가장 순수하신 하느님의 면전에서 거룩한 제사에 참석하기 원하는가? 나는 그럴 자격이 과연 있는가? 나는 죄를 짓지 않았는가? 많이 그리고 자주 짓지 않았는가? 나는 지난번 여기에 있었던 이후로 얼마나 달라졌는가? 지난주에는 어땠는가? 나는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가?’
그런 다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통회가 이어집니다. ‘주님, 저는 고백합니다. 저는 잘못을 저질렀고,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잘못을 뉘우치오니, 저를 용서하소서.’
이어서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제가 이제 선한 일을 하도록 저를 도와주소서. 저를 비추어주시고 힘을 북돋아 주소서. 저의 생각을 붙잡아주시고 저를 경건하고 겸손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사제와 함께 가장 거룩한 영원하신 하느님의 제사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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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로마노 과르디니가 미사 중에
신자들에게 강론했던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100년이 지난 강론을 굳이 번역하여 소개하는 까닭은,
그 사이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전례 개혁이 대폭 이뤄졌을지라도
이 강론이 미사의 본질적인 의미를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독일권에서 전례 개혁 운동이 한창일 때,
이 강론은 그 개혁 운동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곧 이 강론이 교회 안에서 자주 거론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강론은 신자들을 대상으로 쉽고 호소력 있게 전개된 까닭에
신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교회 헌장, 11항)인
미사성제를 깊이 이해하고 더 가까이하기 위해,
계간지 『쌍백합』은 ‘미사성제’에 대한 로마노 과르디니의 강론 전문을
열한 차례에 걸쳐 연재할 것입니다.
이번이 그 첫 번째로 ‘I. 계단기도’입니다.
원문은 Romano Guardini, “Die heilige Messe. I. Das Staffelgebet”, in: Romano Guardini, Predigten zum Kirchenjahr, Matthias-Grünewald-Verlag, Mainz 1998, S. 222-228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