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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제83호(겨울) 신앙의 오솔길

본문


일상의 믿음*

 

1.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예수님의 삶을 전해주는 성경을 주목하여 읽으면, 우리는 곧바로 그분이 당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적게 말씀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영광과 자비, 인간의 죄악과 덕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당신의 사명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당신의 내면, 당신의 개인적인 삶, 당신의 고난과 기쁨 등에 대해서는 거의 깊은 침묵을 지키십니다.

이러한 깊은 침묵과 어둠 속에서 아주 드물게 섬광이 번쩍이는 때가 있고, 그러면 우리는 그 섬광을 잠시 바라봅니다. 이때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물론 위대한 것입니다.

 

2.요한복음 4장 4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그 섬광을 번쩍이십니다. 말하자면 당신의 영혼을 가리운 베일을 우리 눈앞에서 찢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를 살펴봅시다.

카파르나움에는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그 관리는 예수님을 아직 믿지 못하였고, 주저하며 흔들렸고, 결단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아들에 대한 걱정과 불안 때문에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분이 내 아들을 건강하게 한다면 곧 기적을 행한다면, 나는 이를 증거로 삼아 저분을 메시아로 여기고 또 믿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고 그의 생각을 읽으셨습니다. 그분은 관리의 선한 의지가 얼마나 나약하고 흔들리는지를 보셨고, 그가 하느님의 아들인 당신을 시험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치유의 기적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마음을 무척 슬프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3.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했던가요!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무거운 죄가 거의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엄격한 율법이 그들 위에 놓여 있고 너무 무거워서 그들은 율법을 거의 준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제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무한한 사랑으로 가득하셨고,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구세주는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의 아버지이시며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지상 생활이 어떠한지, 곧 사람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지, 언젠가는 어디로 갈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영원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신적 능력과 은총을 베풀어주셨는데, 이는 사람들이 선하게 살도록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구세주는 사람들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구세주를 기쁘게 맞아들여야 옳지 않았겠습니까? 종살이하던 백성이 해방자를 환호하며 맞이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백성은 분명 주님에게서 깊은 인상과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감명은 대부분 놀라운 기적에 대한 감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비상한 일에 매료되었고, 그런 것만을 쫓았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기적을 보고 환호하며 이를 기이하게 여겨 그분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타오르는 흥분, 경솔한 열광, 센세이션일 뿐입니다. 믿음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그들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분의 기적을 목격하거나 들었던 자들이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 15,14) 하고 부르짖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모든 것은 주님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기적이 많은 이들에게 겉치레뿐인 장식품에 불과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자극만을 원했고, 자극과 감탄을 원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이 먼 것을 아셨습니다. 그 중요한 일이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곧 사람은 주님을 따라야 하고, 죄에서 벗어나서 구세주의 모범에 따라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구세주는 당시 종종 황량하고 외로운 곳을 걷고 계신 것처럼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그들이 겪는 곤경에 대한 동정심과 더불어 그들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랐습니다. 그분은 기적 활동을 통해 당신의 신적인 권능과 사명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당신을 믿고, 당신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길을 고집했고, 떼를 지어 구세주께 몰려와 크게 놀라면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가 빨리 사그라지는 짚불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아픔 때문에 주님은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4.구세주를 참으로 이해했던 참된 신앙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당시에도 진정 하느님을 갈망하고 다른 세상을 그리워하고, 아울러 하느님을 향해 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누군가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죄에서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고,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마음속에 있는 모든 연약함과 악한 충동의 얽힘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등을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고, 자신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고 인도하는 누군가를 간절히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를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들었을 때 정말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기적을 목격했고, 거기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적이 없어도 믿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 친히 모든 기적 가운데 가장 큰 기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의 존재 전체에 있는 신적 순수함, 그분의 눈에서 빛난 위대한 사랑, 그분의 가르침 등은 꾸밈없고 자연스럽고 진실하고 심오하여, 거기에서 그들의 마음은 숨을 쉬고 신성한 자유를 느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그들에게 기적 중의 기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믿음도 그들의 영혼으로부터 명확하고 확실하며 강력하게 솟아올랐습니다. 이것은 순수한 믿음이었고, 거기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주님께 온전히 내맡겼습니다. 그들은 이런 믿음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감동의 시간만이 아니라 의무와 불쾌가 섞여 있는 일상의 평범한 시간에서도 믿음에 따라 살았습니다. 휴일만이 아니라 일하는 평일에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믿음이지 짚불도 센세이셔널한 사건도 아닙니다. 오히려 확고한 확신이며, 순수하고 성실한 의지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원하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추구하고 변덕이 심한 사람들에게 지치셨을 경우, 그런 믿음을 지닌 사람 곁에 편히 쉬셨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안에서 바리사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신 적이 있는데, 그들은 서로 다투며 주님을 반대하고 주님께 표징과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행하신 일을 부정하고 늘 새로운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것은 의심과 모순 그리고 냉혹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이럴 경우 주님은 밤에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의 집을 조용히 찾아가셨습니다. 거기에는 세 남매가 살고 있었고,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원하지 않았고 논쟁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으로 맞아들였고, 마리아는 그분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믿는 마음속에 떨어졌고, 깊은 뿌리를 내려 백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5.하지만 그렇게 믿었던 사람은 얼마나 적습니까! 기적이나 표징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이해했던 사람은 얼마나 적습니까! 기적과 표징은 연약한 인간의 감각을 위한 보조 도구일 뿐이며,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신 분을 더 쉽게 깨닫는 데 도움을 줄 뿐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 사람은 자극적인 일과 진기한 사건을 찾았고, 어떤 특별한 것이 그들을 열광시킬 경우만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열광이 사라졌을 때 그들은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성지주일에 ‘호산나’하고 외치며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던 사람들이 닷새 후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소리쳤습니다.

 

6.교우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의 종류를 숙고했는데, 양심은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속하는지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해당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의 뜻은 ‘어떤 특이한 일이 일어날 경우만 너희는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어느 특별한 기회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평범한 일상생활 안에서 신앙을 증거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맙니다. 말하자면 이런 믿음은 주일의 신앙일 뿐입니다. 평일에는 잠을 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질책이 우리 자신에게 해당됩니까?

많은 사례가 있지만 그 가운데 몇 가지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주일 미사에 참여할 경우, 오르간 연주는 그의 마음을 한껏 고양시킬 것입니다. 타오르는 촛불과 장식된 제단은 그의 마음을 엄숙하게 할 것입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 성가, 사제의 기도 등은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그는 이러한 모든 것을 경건하게 느낄 것입니다. 미사 후에 그는 성당 밖으로 나갑니다. 밖에서는 온갖 영업과 오락이 행해지고, 사람들이 오고 갑니다. 경건한 분위기가 사라집니다. 수많은 걱정이 몰려옵니다. 그는 걱정거리와 씨름하며 우울하게 살아가더라도,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청하면 우리를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그는 주일에 미사에서 감동을 받아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런데 고통이 다가오면, 그는 고통에 저항하며 괴로움을 당하지만, 구세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하고 말씀하신 구세주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했던 것과 거의 유사하지 않습니까? 특정한 시간에 교회 안에서는 경건하고 거룩한 모습을 취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늘 하던 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다른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특별한 전례와 축제 행사에 참석하여 매우 경건한 느낌을 갖고 하느님의 크나큰 축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항상 자신을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기도드리는 것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것도 주목하십니다. 곧 그분은 우리가 이웃의 명예를 거스르는 말을 하고 있는지, 우리의 업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지를 눈여겨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그런 모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끝났고, 이제 일상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곧장 잊힙니다.

이것이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적어도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특이한 사건에만 깨어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표징과 이적을 보아야’ 깨어나는 믿음입니다.

 

7.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그분은 우리가 주일이나 저녁 기도 때뿐만 아니라 항상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바라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거룩한 현존 안에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신장, 우리의 모든 생각 등을 살펴보시고 모든 증오와 미움과 불의를 몰아내시어 마침내 우리와 함께 만족해하시려는 것을 자주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입술을 지켜보신다는 것을 의식한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이웃의 사랑과 명예를 거스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일상의 업무를 살펴보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따라서 그분이 “참 좋았다.”(창세 1,31) 하고 말씀하실 수 있도록 일상에 성실하게 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일 강론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우리는 종종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열심히 믿는 신자일지라도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은 우리가 주일에 결심한 바를 평일에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의 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무가 우리를 방해하고 있는 관계로 전례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실 수 있도록 이런 의무를 실행하려는 노력을 통해 믿음이 우리 마음에서 참으로 진실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언젠가 “내 앞에서 걸어가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이보다 더 간결하고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주일과 평일, 교회와 가정과 일터에서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서 걸어갑시다.

 

 

* Romano Guardini, “Der Glaube im Alltag”in: Romano Guardini, Predigten zum Kirchenjahr, Matthias-Grünewald-Verlag, Mainz 1998, S. 215-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