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제61호(여름)-신앙의 오솔길
본문
마리아, 믿음의 순종을 가장 완전하게 실현하신 분
성당이나 성지에 들어서면 교우들이 성모상 앞에 놓아둔 많은 촛불들을 볼 수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들을 바라보면서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이 촛불에는 어떠한 운명, 어떠한 근심, 어떠한 곤경, 어떠한 아픔, 어떠한 감사 등이 담겨 있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 장소에서 성모님께 촛불을 봉헌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아마 인간의 깊은 내면의 무엇이 그렇게 움직이게 하였을 것이다. 그 내면의 것은, 행복이든 고통이든 온전히 말로 표현될 수 없다. 사람들은 형용할 수 없는 그 내면의 것을 잔잔하게 비추는 촛불에 담아 성모님의 포근한 마음에 온전히 내맡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성모님께서 우리의 어머니로서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에까지 우리의 삶에 관여하시면서 헌신적인 사랑과 도움을 베푸신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피조물로서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한 사정을 너무 잘 알고 계시며 또한 시련을 겪는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히브 2,18 참조). 말하자면 성모님은 우리 인간과 매우 친밀하신 분이다. 하지만 성모님에게서는 우리 자신에게 없는 것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우리는 루카가 전해주는 구세주 탄생예고(루카 1,26-38)를 통하여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마리아는 갈릴래아 지역의 변두리에 위치한, 산 속에 있는 마을 나자렛에서 사셨다. 그분은 가난한 부모의 아이로 태어나 오두막집에서 사셨다. 그분의 이름 마리아는 이스라엘에서 널리 알려진 아주 평범한 이름이었다. 그분은 가정의 다양한 일을 돌보는 것을 일상적인 의무로 받아들이셨다. 예를 들어 마을 우물에 가 물을 길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나르는 일을 일상 의무로 여기셨다. 그리고 그분은 요셉이라는 남자와 혼인을 약속하셨다. 당시 약혼 기간은 보통 일 년 정도였는데, 그 약혼은 혼인서약처럼 구속력이 있었다. 이렇게 그분의 삶은 이스라엘의 다른 여느 여자와 같았다. 마리아는 자신의 약혼이 곧 혼인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하셨던 것이다. 그 외에 달리 생각하시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일정한 순간부터 마리아의 삶은 예상과는 완전히 달리 전개되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천사 가브리엘은 그분에게 나타나 이렇게 선포하였다. 곧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과 더욱 가까이 계시기 위하여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몹시 놀라셨고,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셨다(루카 1,29 참조). 그리고 마리아는 이러한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셨다(루카 1,34 참조). 천사가 전해준 소식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이신다. 우리도 이런저런 일에 두려움을 느낀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판단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갑작스런 변화, 외로움 혹은 공동생활, 실패 등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영향력과 인정과 사랑 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 밝지 않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입었다.”(루카 1,30 참조) 두려움은 항상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서 두려움을 덜어주신다. 그러기에 천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느님을 반드시 신뢰하라.”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심연에로 당신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달으셨다. 그리고 그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당신께서 생각하신 삶의 모든 계획을 포기해야 하고, 아니 지금까지 익숙해진 삶의 태도마저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 주님께서 계획하신 새로운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세우신 계획은 마리아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고, 이를 따르기 위해서는 당신을 버리고 날마다 당신 십자가를 짊어져야(루카 9,23 참조) 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마리아에게 계획하심으로써 한순간에 그분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신앙인들이 신앙에 관한 일에 심사숙고도 없이 너무 빨리 동의한다고 사람들은 종종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마리아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분에게서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믿는 사람은 물을 수 있고 또 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물음이 없는 신앙은 피상적인 신앙, 곧 우리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은 신앙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경우 남몰래 도망치는 태도를 쉽게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각자는 이렇게 묻는 것은 유익하다. ‘내 신앙이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나는 신앙의 물음을 꺼려하는가 아니면 나의 생각과 나의 생활을 바꾸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신앙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제기하는가?’
사실 신앙의 의심은 무조건 나쁜 것만이 아니다. 의심은 때때로 우리의 믿음을 더 깊게 해주고, 우리의 믿음을 여러 환영과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긍정적인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합리적인 의심은 믿음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구체적으로 이렇게 물으신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제가 남자의 협력 없이 어떻게 생명을 잉태합니까?”이다. 마리아는 당신의 능력과 한계를 아셨다. 그러기에 그분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계획하셨던 구세주 탄생 예고를 이해하실 수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파악하실 수 없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 인간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알린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린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해진다. 신앙의 핵심이란, 나는 나의 빈약한 가능성과 한계 안에 머물며 불신앙의 태도를 보일 것인가 아니면 내 안에서 그리고 나와 함께 사시려는 하느님의 무한한 가능성 안에서 신앙하며 살 것인가, 이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이란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희망할 수 없는 것을 희망하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고, 지탱할 수 없는 것을 지탱하는 것을 뜻하며, 버림으로써 얻고,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써 목숨을 얻는 것을 뜻한다(루카 9,24 참조).
로마노 과르디니는 나이가 들수록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고백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세 가지는 나이가 들수록 그만큼 더 신비롭게 보였다고 한다. 이해하기 힘든 첫 번째의 것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이다.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들어오시어 인간의 운명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던 이유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돌파하시지 않았던 이유이다. 곧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구원하시지 않았던 이유이다.
첫 두 가지 물음에 대해 과르디니는 이렇게 대답한다. “여기에서 생각은 홀로 더 이상 진척되지 않는다. 어떤 친구가 나에게 한마디 말을 했는데, 그것을 통해 나는 순수한 모든 생각을 통해서보다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러한 종류의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는 ‘사랑은 그러한 일을 행한다.’하고 말했다. 이 말은 항상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이 말은 이성에 무언가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호소하고 내 마음이 하느님의 신비를 느끼게 하였다. 신비는 이해되지 않지만 아주 가까이에 현존하고 있어 불만 불평하는 자세를 없애준다.”(『Der Herr』) 그리고 과르디니는 세 번째 물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권능으로 당신 자신을 구원하셨다면, 인간의 실상 전체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곧 부패된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Wahrheit des Denkens』)
우리가 유명한 신학자의 이러한 물음과 대답을 다루는 까닭은, 마리아가 비슷한 문제로 심사숙고하며 물음을 제기하시기 때문이다. 마리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생각은 홀로 더 이상 진척되지 않는다. 사랑은 그러한 일을 행한다. 사랑은 마음에 호소하고 하느님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신비는 이해되지 않지만 아주 가까이에 현존하고 있다.” 말하자면 마리아의 마음은 이미 하느님의 신비 안에 머물러 있다. 마리아는 온전히 이해하셨기 때문에 하느님께 순종하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아주 가까이 느끼게 된 신비를 신뢰하셨기 때문에 순종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다른 무언가를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이 말씀이 우선 뜻하는 바는 이렇다. 곧 예수님의 근원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흠숭한다. 그분을 만나는 모든 사람은, 아무리 그분과 가까이 있더라도, 그분이 우리 인간과는 ‘전적으로 다른 분’이심을 느낀다.
이 말씀은 또한 인간의 치유와 구원이 항상 하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쇄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젠가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체험한다. 전체주의가 지상에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환상을 제시했지만 몰락한 것과 같다. 인간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 필요하다. 아니 인간은 본래 하느님에게서 창조되고 또한 하느님을 향하여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에 주저하지 않고 마음을 열 경우에만 비로소 치유와 구원을 체험할 수 있다.
마리아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응답하신 것은 이렇게 고백한 것과 같다. “주님께서는 원하신 대로 저에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저를 풍요롭게 하고, 또한 모든 인간의 구원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성모님과 같은 믿음의 순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