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제82호(가을) 신앙의 오솔길
본문
성체성사와 이웃사랑*(Romano Guardini,“Das heilige Sakrament und die Nachstenliebe”in: Romano Guardini, Predigten zum Kirchenjahr, Matthias-Grünewald-Verlag, Mainz 1998, S. 206-214.)
로마노 과르디니 지음
김선태 주교 옮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얼마나 소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서먹서먹하게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삽니다. 각자는 다른 사람을 딱히 싫어하지는 않지만, 자기 자신의 용무, 자신의 특별한 기쁨, 자신의 근심 등을 지니고 있어 다른 사람을 대부분 낯설게 여깁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자기 주변에 장벽을 세워 다른 사람을 멀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같은 직업, 같은 작업 공간이 여러분을 서로 일치시킨다면, 이는 얼마나 특별한 일입니까! 확실히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지만 그렇게 하기를 주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료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 동료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은 내적으로 서로 서먹서먹하고,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삽니다.
그렇습니다. 한 가정 안에서도 종종 남편과 아내는 서로 평행선을 그으며 삽니다. 각자는 자신의 짐이 있고, 하느님께서는 각자 서로 도우며 그 짐을 짊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와 관련된 일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아내의 잔잔한 가사는 부수적인 일이며, 아내가 집안의 걱정거리를 이야기하면 남편은 참지 못합니다. 아내도 집안일만을 생각하며 남편의 일과 생각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서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또 얼마나 마음이 갈라집니까!
자녀들은 부모가 늘 걱정하고 고통받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역시 자신의 길을 냉정하게 걷습니다. 그들에게 마치 부모는 세상의 이웃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부모는 종종 자녀들이 몸과 정신을 위태롭게 하는 길을 걷는 것을 보지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어떤 부모는 성장하는 아들이나 딸이 어떤 상태인지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종종 자기 혈육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인간이 서로 돕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고, 다른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고 거의 마음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느님의 뜻과 다르게 되어갈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서로의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다른 사람을 후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서로의 관심 사항을 묻거나 그 신념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 주제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존중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그 이웃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순수한 이웃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각자가 마음속에 올바른 사랑을 품고 있다면, 이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같은 직장, 같은 기업,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쉽게 나타날 수 있는 작은 불친절과 모욕적인 야유를 삼갈 것입니다. 어떤 다툼이나 어떤 언짢음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울 것입니다. 그는 기가 꺾여 보이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이고 동정적인 말을 건넬 것입니다. 그는 이쪽에서는 도움을 베풀고 또 저쪽에서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사람들의 마음을 점점 크게 얻을 것입니다. 물론 그는 한두 번쯤 동료들의 비웃음을 받겠지만 곧바로 신뢰를 얻습니다. 동료들은 그의 마음속에 선과 사랑이 가득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생각해 봅시다. 만일 남편이 매일 성실하게 일하는 아내가 일구어내는 것을 바라본다면 곧 아내가 하루 동안 견디어내야 하는 것을 바라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남편이 아내의 걱정거리에 관심을 두고 아내의 말을 인내로이 경청하며 좋은 해결책을 제시할 경우, 아울러 남편이 자신의 걱정거리와 노고를 아내와 함께 나눈다면, 얼마나 마음이 서로 가까워지겠습니까! 남편이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일을 아내가 진심으로 대하고, 자신과 함께 기뻐하고 걱정하고, 항상 자신을 더욱더 깊이 이해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내는 남편에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인생의 진정한 협력자가 될 것입니다.
참된 사랑을 지닌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 살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기쁨을 나눕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보살핍니다. ‘자녀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무엇을 읽는지, 어떤 일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언제 외출하고 언제 귀가하는지?’ 등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사랑으로 자녀들을 가르치고, 경고하고, 충고하고, 필요할 경우 벌을 줍니다. 결국 사랑은 자녀들의 눈을 열어, 부모가 자신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를 자녀들이 알아차리게 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부모가 걱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어떤 때는 부모에게 친절한 말을 기꺼이 건넬 것이고, 또 어떤 때는 부모를 기쁘게 하고, 부모를 도와주며 늘 행복한 얼굴을 보일 것입니다.
한집에서 함께 사는 모든 친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가족이나 친척의 마음을 하나로 모읍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완고하고, 불친절하고, 힘겹게 하는 많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일에 실패한다면,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여러분의 기분은 아주 좋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화를 내어 결국 자기 자신을 거의 통제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이웃은 각각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과 결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종종 불편을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정이나 작업장 등에서 그 이웃을 항상 우리 주변에 가까이 두면,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당히 지겹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불친절하게 대하고 상처를 준다면, 우리가 똑같이 보답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 노력해야 합니다.
친절한 말을 하거나 도움을 주는 일에서 우리 마음은 너무 게으른 습성이 있습니다. 항상 즉시 불쾌감을 느끼는 민감한 특성도 있습니다. 이는 절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극복해야 하는 반감과 혐오감도 있습니다. 친근감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일부를 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관계가 훨씬 더 좋아집니다. 나만을 위한 약간의 시간과 편안함도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희생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희생하는데 누가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사랑의 힘을 줍니까?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계신 우리 주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바로 그분에게서 비롯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에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예, 주님! 저는 이웃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저는 사랑을 원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이런 사랑이 없습니다. 어디서 제가 그 사랑을 얻어야 합니까?”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이것이야말로 참된 대답입니다! 거룩한 성체를 통하여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그분의 거룩한 마음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거룩한 성체에서 구세주의 모범이 우리에게 명확하게 나타나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거룩한 성체성사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자기를 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희생하라는 계명이 도드라집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는 성사를 제정하셨을 때, 그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먼저 당신 손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최후 만찬을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가르침으로 이렇게 마무리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원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주님의 이런 뜻을 정말 잘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만찬을 거행했고, 거기에서 모두가 거룩한 성체를 모셨던 것만 아니라 하나의 만찬에서 내적인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랑이 거룩한 성체와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미사 중에 사제와 부제와 차부제는 오늘날도 주님의 몸을 모시기 전에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많은 장소에서 그렇듯이 백성 모두는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를 포옹합니다.
여기에다 거룩한 성체는 여러분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은총을 베풀어주고, 그런 실천에 요구되는 희생의 은총을 베풀어줍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태양이 달을 비추고, 달은 태양의 빛으로 빛을 발산합니다. 우리 마음은 차갑지만, 우리 구세주가 거룩한 성체로 당신의 따스한 사랑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불어 넣어주시어,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분과 일치하면 우리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체는 우리가 구세주와 함께 사랑하고, 우리가 하루 가운데 종종 그분을 생각하는 데에 필요한 힘을 줍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 마음속에 오시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도록 도와줍니다.
특히 무언가가 긴급히 필요할 때 우리는 그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짜증이 나서 ‘내가 지금 무척 힘들고 모욕을 겪고 있다.’라고 느낄 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당신은 제 안에 계십니다. 저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잘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그렇게 됩니다. 혹은 어떤 사람이 우리를 거칠게 대하고 불친절할 경우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은 제 안에 계십니다. 당신의 인내를 저에게 주십시오. 저는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할 때마다 항상 그렇게 행동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시작하면, 이것은 다시 사랑을 일깨워줍니다.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항상 선한 마음으로 대하면, 곧 가족이나 지인 혹은 직장 동료를 그렇게 대하면, 그 이웃은 서서히 그와 좋은 관계임을 알아차립니다. 아무리 그 이웃이 불친절할지라도, 그는 서서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의 불쾌한 감정은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에게 잘되지 않기를 바랄지라도, 성경은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타적인 성실한 자비가 다른 사람의 차가운 마음을 이겨낼 경우, 사랑은 최고의 가족애, 최고의 우정, 최고의 동지애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 되도록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그분의 인내는 다른 사람에게 인내하도록 우리에게 힘을 줄 것입니다. 그분의 우정은 다른 사람을 자비롭게 대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도록 우리를 가르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약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쉽게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은 그렇게 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기도하셨을 때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지고 하나가 됩니다. “저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요한 17,20 이하)
이제 보십시오. 여기에는 하나의 신비가 있는데, 그처럼 놀라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례로 다시 태어난 사람에게서 곧 신앙과 은총으로 하느님과 일치한 사람에게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8)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물은 은총을 상징합니다. 생수의 강들이 그런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온다고 주님이 말씀하신다면, ‘그분 안에 머무르고 또 그분이 머무르는 사람’에게서 넘치는 은총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런 은총의 강들이 어디로 흘러갑니까? 다른 곳이 아니라 사랑으로 주님과 결합된 사람들의 영혼으로 흘러갑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아름다운 진리입니다. 주님이 거룩한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신다면, 이 은총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은총이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은총을 우리를 통해 전달하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함으로써 그 은총이 전달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진지하고 자비롭게 만난다면, 주님의 은총은 우리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고, 사랑을 통해 당신의 은총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사랑의 실현을 위해 대가를 많이 치를수록 더 많은 은총이 우리 영혼을 통해 다른 사람의 영혼으로 넘치도록 흐를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주님의 식탁 곧 미사성제에 참여하면, 주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주님을 모셨던 것이 아니라 자녀들을 위해, 집안 전체를 위해서도 모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타적인 진정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마주한다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인내하며 평화롭게 지낸다면, 이는 그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은총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아들과 딸 그리고 친지도 같은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집으로 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를 만나면, 그리스도의 은총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됩니다.
각자는 주님과 그분의 은총을 자기 직장, 친구, 직장 동료, 윗사람, 아랫사람 등에게로 전달합니다. 각자가 사랑을 실천할 때마다 곧 그리스도를 위해 자비롭고 친절을 베풀 때마다, 그리스도의 은총을 전달합니다. 그리고 은총은 마음속에서 작용하고, 신앙을 강화하고 선한 마음을 일깨우고, 악에 강력하게 대항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그릇된 길에 들어선 사람에게, 교회와 성사를 모르는 사람에게 얼마나 많이 사랑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이는 한 지체에서 다른 지체로 흐르는 따뜻한 피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모두 한 몸이라고 말한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고, 주님은 생명을 선사하시는 그 머리이십니다. 교회에는 박동하는 따뜻한 주님의 심장이 있습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1코린 10,17)
주님을 모신 사람은 자기 가정에서, 자기 주변에서, 자기 직장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흐르게 하는 살아 있는 동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살아 있는 지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또 이를 전달합니다. 은총은 머리이신 주님에게서 나오고, 우리 인간인 모든 지체를 통해 흐릅니다. 그리하여 은총은 우리를 강화하여 초자연적인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가장 거룩한 성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은총의 친교보다 더 위대하고 더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까?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우리의 시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의 불행한 상황(역주-이 강론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에 행해졌기 때문에, 당시 전쟁의 불행한 상황을 가리킨다)을 향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다시 화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교황은 교우들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는 증오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사람들이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특히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동으로도 협력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무엇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작은 돌을 호수에 던지면, 먼저 아주 작은 원이 그려지지만, 그 원은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 호수 전체를 에워쌉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변에서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지극히 거룩한 성체의 힘으로 사랑을 다스리고, 그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그 작은 원은 신비스럽게도 커지고 계속 작용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떻게 그리되는지 잘 모르지만,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은 그 길을 찾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신앙만이 이를 이해합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 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작용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진지한 일상적인 사랑을 통해서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의 실현을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참되고 진지한 평화의 실현을 말입니다. 적대적인 민족들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저는 그들 안에 있고 그들은 제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자주 주님을 모시고, 살아 있는 사랑의 사도가 되어, 그리스도의 은총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각자 자신을 위해, 자기 가족을 위해, 자기 직업을 위해, 자기 친구를 위해, 자기 아랫사람을 위해 우리 주님의 마지막 소원 곧 그분의 유언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저는 그들 안에 있고 그들은 제 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