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제80호(봄) 신앙의 오솔길
본문
“높이 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더 깊이 내려가야 한다.”
두바이의 고층건물
2010년 1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완공되었다. 높이 828미터에 달하는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가 그것이다. 지상 163층(첨탑층 포함시 209층, 지하 2층)으로 된 이 건물에는 호화 아파트, 사무실, 전망대 그리고 호텔 등이 있다. 물론 건물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계단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 56개의 승강기를 이용하면 된다. 그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승강기가 있다. 그 승강기는 1초에 10미터의 속도로 승객을 실어 나른다.
어떤 기자가 이런 초고층 건물을 안전하게 짓기 위해 기초를 얼마나 깊이 놓아야 하는가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건축 회사는 철근 콘크리트로 12,300 입방미터 크기의 기초를 놓고, 부분적으로는 50미터 깊이에까지 이르는 쇠말뚝을 800개 넘게 시추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런 거대한 건물이 안전하게 서 있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한 기초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오직 우러러봄으로써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
우리는 종종 하늘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 대부분 지상을 바라보고 지상에 마음을 둔다. 특히 우리가 세상에서 크게 성공하기를 바랄 때, 우리의 시선은 더욱더 지상을 향한다. 그 결과 우리의 시야는 매우 좁아진다. 세상을 넓고 깊게 바라보는 시선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은 일에 무척 예민하게 반응하는 반면, 정작 중요한 일에는 관심이 없거나 소홀하기 일쑤다. 이런 상태에서 결국 우리의 삶은 고리타분해지고 그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실현하려는 사람은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콜로 3,1) 해야 한다. 지상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늘에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시선은 더욱 넓어지고 더욱 깊어진다. 자신의 일상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시야를 갖게 된다.
두바이의 고층건물은 바로 이런 넓은 시야를 보여준다. 이 건물은 우리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상적인 일에만 늘 매이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대 자신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늘 광활하고 빛이 찬란한 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대 마음은 넓어지고 빛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대의 일상적인 모든 걱정은 상대화될 것이고, 그대를 압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그 걱정을 감당하고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는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비로소 참된 인간이 됩니다. 위를 향한 시선으로 말미암아 그대는 영원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주는 메시지에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 메시지는 그대의 참된 고향이 이 세상이 아니라 찬란한 빛 자체이시며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자체이신 하느님이라고 끊임없이 외칩니다. 그 하느님의 형상은 바로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은, 그에 상응한 방식으로 우리가 깊이 내려갈 때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막 한가운데에 안전하게 서 있는 두바이 고층건물이 주는 의미이다. 이에 관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일전에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가장 작은 것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대가 높은 건물을 세우려고 계획한다면, 그대는 먼저 기초를 깊게 놓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높은 건물을 세우고 그 건물의 무거운 중량을 그 기초에 의지하려는 계획이 있는 사람은, 건물이 높을수록 그 기초는 그만큼 더 깊게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세워지는 건물은 높이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초를 놓고자 하는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내려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건물도 높이 올리기 전에 먼저 기초를 놓는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게 되고, 그 기초를 세운 다음 정상이 세워지는 것입니다.”(PL 48,441) 아우구스티노의 이 말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이것은 당시나 오늘이나 진리이다.
영적 법칙인 겸손
아우구스티노의 말에서 우리는, 두바이 사막의 꽃인 ‘부르즈 할리파’의 건축 법칙이 영적 법칙인 겸손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법칙을 공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높이 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래로 깊이 내려가야 한다.’ 이것은 두바이의 빌딩이 건축의 측면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높이 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래로 깊이 내려가야 한다.’ 이 법칙은 기술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측면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특히 신앙생활에서는 더욱더 중요하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서는 신앙생활이 아니고서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일을 좀처럼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서정적인 언어로 표현된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제가 추구하던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저는 그만큼 더 망상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몹시 지치고 무감각해졌습니다. 특히 저는 용기를 완전히 잃었습니다.” 성인이 하느님께 더욱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을 더욱 잃고 깊은 혼란에 빠지는 어둠을 극도로 체험했다는 겸손의 고백이다. 위로 높이 올라가는 것과 아래로 깊이 내려가는 것은 서로 별개의 일이 아니다. 사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는 그가 아래로 깊이 내려가 있는 상황 곧 평정을 잃고 크게 당황하는 시련의 시기에 제대로 알 수 있다.
페르디난트 사우어브루흐(Ferdinand Sauerbruch, 1875-1951)는 한때 외과 의사의 권위자로 유명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나의 삶』에서, 히틀러 내각의 제국 교육성 장관이었던 베른하르트 루스트(Bernhard Rust, 1883-1945)의 에피소드를 다룬다. 사우어브루흐 의사는 루스트 장관을 그의 방에서 수술했다. 일주일 후에 의사가 장관을 방문했을 때, 장관은 의사의 인사에 대답하기는커녕 탁상시계를 손에 들고서 침묵으로 시위했다. 의사가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장관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6시에 예약했습니다. 지금은 벌써 일곱 시입니다.”
이에 의사는 장관에게 정중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다. “장관님, 먼저 장관님은 저를 예약할 수 없습니다. 예약할 수 있는 것은 해충을 없애는 사람이나 그와 유사한 사람입니다. 아울러 저는 장관님에게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번은 제가 대통령을 진찰하러 두 시간 늦게 찾아갔을 때, 저는 그분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대통령이 저에게 무슨 말을 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 미안합니다. 늙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당신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으니 말입니다.’” 대통령은 의사의 시간을 귀중하게 여겨 자기 자신을 낮추어 의사를 대했던 반면, 장관은 의사를 자신의 소유물로 대하며 교만하게 처신했다.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는 장관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성인들은 오직 겸손한 삶을 통해 내밀하고 고요한 심연에 이르는 길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한결같이 강조한다. 겸손의 덕은 때때로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위대한 삶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기초이다. 실제로 이제까지 위대한 사람들은 항상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겸손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우리가 ‘겸손’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에 대해 리지외의 데레사는 “겸손은 진리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진리를 좀 더 가까이 생각해보자. 겸손한 사람은 먼저 자신이 받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식한다. 곧 모든 것을 다 거저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자신의 것을 형제들과 나누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겸손은 형제적 나눔에서 잘 드러나고, 교만은 이기심이 가득한 탐욕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교회학자 대 바실리우스(330-379)는 분명하게 이렇게 언급한다. “유혹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불 속에서 금이 정련되듯이, 불행을 통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하지만 행복도 유혹이 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행복한 시기에 교만해지지 않는 것도 어렵습니다.… ‘내가 내 재산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왜 누군가를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입니까?’라고 인색한 그대는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대의 것인지 제게 말해 보십시오. 그대가 이 세상에 갖고 온 것이 무엇입니까? 극장에서 먼저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사람이 나중에 들어오는 사람을 지나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누구나 즐기라고 있는 공간을 마치 자신만의 것처럼 여기듯이, 그대는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대가 숨겨 둔 그 빵은 굶주린 이들이 먹어야 할 빵이며, 그대의 옷장에 처박아 놓은 옷은 헐벗은 사람들이 입어야 할 옷입니다. 그대의 금고에 숨겨 둔 돈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살아야 할 돈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투덜거리며 무뚝뚝합니다. 그대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합니다. 그래서 아주 적은 것을 희사하는 것도 필요 없게 합니다. 그대는 한 가지 말만 할 줄 압니다. ‘가진 것이 없어 줄 수가 없어요. 나 자신이 가난해요.’ 그대는 참으로 가난하고, 선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대는 사랑을 행하는 데 가난하고, 하느님을 믿는 데 가난하고, 영원한 희망을 지니는데 가난합니다.”(PG 31,261 이하) 여기에 우리는 이렇게 덧붙일 수 있다. ‘그대는 위대함에서도 가난합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받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의식이 생기는 깊은 겸손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 바실리우스의 이런 진술에는 겸손한 인간을 더욱 고무하는 또 다른 내용이 담겨 있다. 그것은 겸손한 사람이 스스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만 아니라, 자신이 무로부터 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위를 향해 더 올라갈수록, 그에게는 그만큼 더 깊은 심연이 열린다. 곧 그는 하느님의 빛 안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무익함을 깨닫는다. 그는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무익하며,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식으로 인해 자기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기대한다. 위를 향해 남김없이 마음을 개방하고 내맡기는 태도가 바로 참된 신앙이다.
‘높이 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래로 깊이 내려가야 한다.’ 이 법칙에는, 겸손한 사람이 자유로이 내릴 수 있는 마지막 결론이 담겨 있다. 그 결론은 죽음의 신비와 관련되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빛에 오르려는 사람은 죽음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곧 겸손한 사람은 죽음의 어둠 속으로 내려감으로써 하느님의 빛을 향해 오를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든 것을 자기 현존재의 무無 안에서 체험함으로써, 실제로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진리를 깨닫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던 겸손을 언급한 필리피서의 말씀을 음미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5-11)
어떤 성인에게 가장 첫째가는 덕행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겸손’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에게 또다시, 둘째가는 덕행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도 ‘겸손’이라고 말했다. 이어 셋째가는 덕행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도 역시 ‘겸손’이라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