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제79호(겨울) 신앙의 오솔길
본문
가난의 의미와 축복에 대하여*
베른하르드 벨테 지음 / 김선태 주교 옮김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가난에 찌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의 옷차림과 가정과 살림, 그 밖의 사정 등을 살핍니다. 이때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동정심과 도움을 베풀고 싶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을 상당히 억제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불편한 마음은 가난을 마주할 때 일어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며, 우리는 이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 안에서 엿볼 수 있는 어둡고 부패한 인간상에 대해 경고를 받는 것처럼 느끼며, 무언가 차갑고 낯선 것이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처럼 느낍니다. 물론 우리는 어쩌면 이런 일에 익숙한 관계로,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이유로 인해 그런 감정의 목소리를 가볍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비본질적인 것인 양 무시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계속 자신의 목소리를 냅니다. 그런 목소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아주 나지막하고 여리게 되었다면, 이는 그 목소리가 아주 깊은 곳에서 솟아 올라왔기 때문이 아닌가요?
가난의 이러한 나지막하고 낯선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은 비록 내키지 않겠지만, 아주 유익합니다. 그런데 가난에 직면하여 우리에게 경고하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물음입니다.
불편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요? 가난한 사람은 우리에게 인간의 마음은 본래 가난하며, 따라서 우리의 마음도 가난하고 열등하고 혼탁하고 소란하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이 아닌가요? 가난한 사람이 늘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자신에게 참으로 솔직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도 가난하다는 사실을 감추고 외면하고 잊으려고 늘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상황은 우리 모두가 처해 있는 가난에 의해서만 인간적으로 이해됩니다.
가난의 종류
가난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가난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상적으로 재화를 넉넉하게 모았을지라도, 그래서 그 재화에 둘러싸여 미래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모든 재산과 이에 기초한 피상적인 보장에는 그 언짢고 감추어진 찌꺼기로서 걱정이 남겨집니다. 이 걱정은 모든 것을 거듭 의문시합니다. 이 걱정은 완전히 진정될 수 없는 양심에서 비롯되는데, 곧 우리의 양심은 이런 피상적인 보장과 안정이 근본적으로 확실하지도 영속적이지도 않으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 불안하고 허무한 그 토대와 기초에 우리의 삶을 세우지 말라고 거듭 충고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주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그런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궁극적인 무능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과 같이 크나큰 불행과 힘든 시기는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보였던 우리 현존재의 가난하고 무력한 밑바닥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인간이 처한 상황이 바로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윤리적 가난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에토스Ethos에서 기인하는 존엄과 내적 능력이 없이는 우리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존엄을 온전하게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요? 우리는 모두 죄를 짓지 않았나요? 우리 마음의 한가운데에는 무언가 부패하지 않았나요? 우리 가운데 누가 당연히 존재해야 할 모습으로 존재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응당 존재해야 할 모습으로 그렇게 온전히 선하고 고상하고 당당하게 존재하는가요? 복음이 전해주는 것처럼, 간음한 여자에게 깨끗한 양심으로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가장 내적이고 가장 민감한 마음에 자리 잡은 이런 가난 때문에 몹시 괴로워합니다. 겉으로 자신의 안녕과 덕행을 뽐내는 사람들도 그토록 열심히 고수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인해 자신에게마저 숨긴 그 가난을 마침내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하고 가장 비참한 가난은, 우리가 반드시 죽어야 하고 이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순수하고 숭고한 빛이 인간의 죽음을 두루 밝힐 수 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빛도, 죽음이 우리를 매우 비참하고 왜소하게 만들고, 자포자기하게 하고 발가벗긴다는 사실을 결코 없애지 못합니다. 바로 죽음 안에서, 이전에 그리고 항상 우리 삶에 감추어진 채 작용했던 모든 종류의 가난 곧 근심스러운 불확실성과 윤리적 곤경 그리고 그 외에 있을 수 있는 다른 모든 비참함 등이 집약되고 폭로되고, 더욱 예리하고 가혹하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소유와 권력과 질서와 존엄에 관련하여 지상에 존재하는 것을 엄밀하게 보자면, 그 의미와 권리와 무게 및 자리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일찍이 우리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는 이러한 모든 것이 인간 마음의 가장 내적인 근원적 목소리에 온전히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심오하게 이해하자면, 가난은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문제이며 가장 내적인 걱정거리입니다.
극복할 수 없는 가난
그러나 인간이 절대로 가난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훨씬 더 깊은 인간의 본질에 속합니다. 이른바 삶 자체는 모든 형태의 가난을 거슬러 저항하지 결코 침묵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가난해지고 무력해지고, 불확실하게 되고 희생되고 열등해지고 미미해지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며 또 정당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저항이 지상에서 그칠 경우, 삶 자체는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가난을 늘 만족하게 여길 때 삶 자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난을 거슬러 무언가를 행동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현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명령에 속합니다. 인간은 성실해야 하며, 일하고 계획하고 자신을 투신하고 자기 삶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는 윤리적 존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죽음 자체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이러한 활동으로부터 모든 인간은 삶을 영위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노력, 말하자면 어디에서나 위협하는 가난을 극복하려는 최선의 노력으로부터 인간은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많은 노력이 꼭 필요하고 또 최선의 의무로 정당화될지라도 우리는 인간의 가난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의 현존재에 정말 큰 충격을 줍니다. 물론 인간이 삶을 위협하는 혼란을 더욱더 잘 통제하고 자신의 재화와 질서를 더욱 안전하게 지키고 또 다양한 질병과 전염병의 엄청난 위력을 이겨냄으로써, 가난의 영역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러한 성공을 통해서 인간의 본래적인 가난이 결정적인 점에서는 조금도 줄여질 수 없었다는 사실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불확실성, 무상함, 무력과 죽음은 여전히 계속되고, 인간 존엄에 대한(감당하기 어려운) 상실감과 더불어 윤리적 곤경도 여전합니다. 이는 마법과도 같습니다. 곧 인간의 가난은 갈수록 그 기반을 잃고 있지만, 늘 온전하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난에 대항하는 모든 노력은 꼭 필요하고 또한 대단히 유익하지만, 궁극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헛된 일입니다. 가난은 모든 인간적인 것의 특징으로 나타나며, 마치 그림자와 악한 양심처럼 인간의 뒤를 따라다닙니다. 우리 인간이 생명의 목소리를 따르는 가운데 가난에 대해 만족할 수도 없고 또 만족해서도 안 되고, 그래서 가난에 대한 저항과 반항이 우리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든 노력이 궁극적으로는 매우 헛된 일로 여겨질 수 있는 상황은 분명 끔찍합니다.
가난 앞에서 도피와 방어
이러한 곤경스런 상황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자기 현존재의 깊은 곳으로부터 동요하는 인간이 가난한 존재의 곤경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주 진기한 방식으로 도피와 방어를 일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영역 내에서는 이러한 곤경에서 벗어나는 실질적인 출구가 없고,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인간이 근본적으로 잘 알고 있는 관계로, 인간은 예부터 이러한 일에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현실에 대해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인간의 가난과 무력 때문에 그렇게 나쁘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거듭 최면을 걸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지혜롭고 강한지를 주장하기 위하여, 인생에서 쓸모없고 가난한 그 모든 것이 인간의 혼잡한 생활에서 나오는 쓰레기로서 생각해야지 진지하게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여러 이론을 고안해냅니다. 혹은 그는 안녕을 촉진하기 위해 끊임없이 활동에 매진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실제로 순수하고 명확하게 도움을 주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습니다.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기만적으로 진정시키는 이런 시도에는 인간의 가난과 무력과 죽음의 모습을 자기 자신에게서 아주 멀리, 마치 현존재의 외적 지평은 물론 내적 지평으로부터 멀리 밀쳐내려는 의도가 감추어 있지 않은가요? 곧 자신의 마음과 삶에서는 그런 것이 절대로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말입니다! 인간은 같은 기만적인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경제적 상태에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이제는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하고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그는 종종 내적 능력을 엄청나게 치르면서까지 특히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대중에게 덕을 온전하게 잘 갖추어 부족함이 조금도 없는 듯한 자신의 외모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아주 심각하고 모든 시도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곤경에 직면하여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드물지 않게, 기괴하고 대담한 방법으로 필사적이고 궁극적인 수단을 강구합니다. 곧 그는 가난과 작음과 인간적 나약함을 더 이상 감출 길이 없을 때 그것을 긍정적인 가치로 만들고, 상당히 불편한 이러한 것을 피할 수 없을 때 그것에 본질적이고 충만하고 덕스러운 현존재의 광채를 덧씌우려고 필사적으로 시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고 부르는 현상입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의 마음에는, 가난과 비참이 아니라 자비와 겸손과 양순한 덕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또다시 설득하는 마지막 시도입니다. 도피와 방어의 이러한 수많은 시도는, 비록 그 가운데 하나가 적지 않게 다른 모습과 첨예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대립하고 있을지라도,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익숙한 일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이러한 놀랍고 기만적인 시도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참된 것과 필요한 것이 담겨 있다고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러한 시도는 거의 항상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시도를 전적으로 마비시킴으로써 모든 것을 치유하고 질서를 잡으려고 한다면, 이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되려 많은 불의와 피해마저 겪게 됩니다. 이는 마치 가라지와 함께 많은 밀을 뽑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활동 전체가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단일한 뿌리와 근원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하고,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곧 가난과 불확실성과 인간 마음의 곤경 등을 감추는 하나의 놀이입니다. 이러한 많은 활동이 지니고 있는 성급함과 예민함, 초조함과 격렬함에는 드물지 않게 그 활동에 더 깊이 감추어져 있는 생명이 드러납니다.
인간에 대한 진리의 전초병인 가난한 사람
바로 이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 우리에게 덮치는 불쾌한 감정도 가장 깊고 가장 인간적인 의미를 얻습니다. 자신의 일반적인 가난이 외적으로, 그러니까 경제적이고 사회적 차원의 공개적인 영역까지 알려진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가난한 사람은 단순히 자신의 현존재와 외모를 통해서 인간 사회의 가장 불가피하고 가장 일반적인 환상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간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지를 단순하게 보여줍니다. 결코 볼 수 없어야 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깊은 고요 속에서도 마음을 졸이며 감추고 숨기는 그것이 그 가난한 사람 안에서 가림막 없이 나타납니다. 가난한 사람은 너희가 그렇고, 인간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부인할 수 없는 단순한 자신의 현존재로 인간이 만든 환상의 바벨탑 전체를 뒤흔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가난한 사람이 인간 사회에 실행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봉사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생명은 환상이 비록 위대하고 일반적임에도 불구하고 쓰라린 진리를 온전히 감추거나 압도할 수 없는 질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며, 그 진리의 전초병인 가난한 사람은 그 역할을 이행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들을 두루 바라보고, 또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가난과 무력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이 되는 용기를 지닐 경우, 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다르게 대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낯선 장벽은 진리의 쓰라리고 순수한 빛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이 빛은 동시에 인간적 서열과 인간적 신분 차이에 대한 감각이 어디에선가 활성화되는 것을 방해할 것입니다. 이 빛은 가난한 사람을 순수하게 모든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하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그 순수한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더 근본적으로는 같은 땅에서 사는 형제나 자매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모습의 운명을 지니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을 대체로 어두운 인간 운명을 겪는 동료와 전초병으로도 여기며 그에게 손을 내밀 것입니다. 그 자체로 쓰라린 이러한 상황은 나중에 일어날 종말사건에 의해 두루 빛날 것입니다. 그 사건은 더 이상 인간적인 것을 피할 필요가 없는 고요하고 깊고 밝은 사건입니다.
이에 관해 희망의 별이 떠오를 것이고, 그 별은 인간적인 것과 그 모든 가난 위의 높은 곳에서 그 빛을 비추어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이유
예수님의 메시지는 다음 말씀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나자렛 회당에서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을 때”(루카 4,20), 예수님은 당신 사명의 서언처럼 이사야서 6장 11절의 말씀을 낭독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나에게 내리시어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루카 4,18 참조). 우리는 이러한 말씀과 어조를 복음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의 가장 내밀한 관심사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관심사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메시지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가난에서 부름을 받습니다. 곧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 깊이 담겨 있는 가난과 무력의 일반적인 상태에서 부름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관건은 가난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회의 제3계층 혹은 제4계층이나 이와 유사한 계층을 상향 조정하는 사회의 개혁이 관건이 아닙니다. 이를 의심하려는 사람은 다소 충격적인 로마서 제1장을 좀 더 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관건은 인간입니다. 곧 모든 사람이 가난에 깊이 연루되어 있지만 아무도 이를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가난한 사람이 예부터 자기 마음에 두었던 수많은 환상의 베일을 지적하고 있고, 마침내 마음의 단순하고 초라한 상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상태에서 인간은 그렇게 작고, 최종적이고 본질적인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비할 데 없는 현실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가난에서 행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복음의 대답은 명확하고 충분합니다. 가난은 가난 때문에 칭송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약함이나 이와 유사한 것에 대한 병적인 사랑을 칭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이 칭송받는 이유는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그러니까 하느님의 부유와 권능 때문입니다. 여덟 가지 행복 선언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루카복음 6장 20절도 그 나라에 대해 언급합니다. 가난을 언급하는 곳은 어디서나 하느님의 나라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 6장 24절은 가난한 사람의 행복 메시지에 불행 선언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자신의 부유와 권능에 구원과 희망을 두고 세속적 환상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 환상은 하느님 나라가 나타나기 전에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거침없는 불행 선언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복음이 소심하고 나약한 정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불행 선언은 오히려 위대하고 당당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행 선언의 이면에는 초인간적으로 빛나는 권능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와 엄숙한 심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난한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거듭 되돌아본다면, 그는 세속의 권세와 안전을 더 이상 온전히 맞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렇게 그에게는 인간의 나라가 침몰함으로써 복음에 기꺼이 내어 맡기는 일이 일어나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음이 선포될 것입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권능과 위대하심 때문에 존립하는 것이지, 가련한 인간의 그 어떤 모습 때문에 존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그 나라 앞에서는 가난하거나 부유한 인간의 외관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보잘것없는 인간 마음과 삶에 의해 결코 한정되거나 방해될 수 없는데, 이는 그 나라의 권능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 앞에서, 오직 그 메시지 앞에서만 가난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선포에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메시지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감추어진 채로, 그러나 모든 것을 지탱하고 기뻐하며 구애하는 모습으로 울려 퍼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대개 자연적 조건이 결핍된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사람들에게 호소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하여 드러나는 사랑은 결코 광신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적 질서와 서열을 지워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처럼, 여기에서 언급되는 사랑은 자연적으로 달갑지 않은 것, 곧 인간의 부수어지고 보잘것없는 모든 모습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인간적 모습에 마주하여 놀랍고 뛰어난 힘을 발휘합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가난의 신비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며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의 가난에 도래한다는 메시지는 주님의 십자가와 거룩한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을 지탱하고 결정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가난의 신비가 가장 감동적으로 계시됩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의 일반적인 가난은 주님의 비할 데 없는 마음 안에 가장 참되이 그리고 조금도 거짓 없이, 그러기에 가장 낯선 모습으로 집약됩니다. 그분은 그 가난을 받아들이고, 당신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해주듯이 무력, 모욕, 벌거벗음, 어둡고 끔찍한 잔혹성 등을 극단에 이르기까지 두루 겪으셨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죽음의 가난은 예수님이 모든 가난의 뿌리인 죄까지 짊어지심으로써 가장 깊은 곳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 곧 가장 어둡고 가장 악랄한 짐을 짊어지신 채 온전히 기꺼운 마음으로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모든 가난은 완전히 밝히 드러났고, 가난에 그리 친숙하지 않은 진리의 빛이 나타났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을 통하여 인간의 가난과 무력과 곤경을 영광스럽게 변화시키고, 가난한 사람의 행복과 하느님 나라의 기초를 놓는 본질적인 자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고 그러기에 비천하게 된 인류를 주저 없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사랑과 자비에 맡기시기 위해, 죽음에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예부터 자기 자신의 진리에 반대하고 하느님을 반대하여 세웠던 인간의 기만적인 모든 나라와 거짓스러운 세력과 부유는 부수어졌습니다. 겉으로는 항상 단단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수어지기 쉬운 기초가 이제 근본적으로 사라지고 없어진 것입니다. 그 대신에 새로운 기초 곧 인간 삶의 토대와 원천이 나타났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정의와 권능과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진실하고 무한한 생명의 강은 마치 댐이 파괴되었다는 듯이 거세게 흐르고,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한 인간 종족 한가운데에서 뿌리를 내립니다. 가난한 인류의 머리와 주님으로서 당신 안에 인류의 가난 전체를 끌어모으시는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의 부유와 사랑에 의해, 인간의 능력으로 건설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광채와 부유에 의해 에워싸이시고 받아들여지십니다. 바로 거기에 가난한 모든 사람의 행복이 있습니다.
가난에서 시작되는 구원
우리의 관건은 모든 인간의 가난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난에서 모두 형제자매이고, 거룩한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여야 하며 그 표징에 가까이 모여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죽음과 일치를 이루고 있으며, 거룩한 성찬례를 거행함으로써 그 신비와 새롭게 일치를 이루며 십자가를 우리 삶의 근본 법칙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가난을 받아들이시어 구원을 가져오셨던 것처럼,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편에서 인간의 가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가난의 메시지에 대해 무자비하게 생각하는 현실을 정직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가난에 가까이 다가서야 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비구원 상태를 시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짓의 짙은 안개를 날려버려 자신의 주변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선 요구되는, 실제 상황에 맞서는 용기이며 이로부터 모든 구원이 시작합니다. 물론 세상의 재화는 나름대로 가치와 질서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임수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재화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용해야 하지만, 또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분노하지 않고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더 깊고 더 높은 것을 향해, 곧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열려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가난에 대해 절망하고 가난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회개와 구원의 시작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엄청난 해방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끝을 모르던 옛 고통을 드디어 끝냅니다. 말하자면 항상 자기의 나약함을 가리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가난하고 가련한 자신의 본질보다 더 위대하게 드러내려고 노력했던 일들을 끝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원하지 않지만 항상 있는 바로 그 모습으로, 십자가의 메시지에 의해 구원을 받습니다.
계속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먼저 곤경으로만 여겨지던 가난의 곤경을 이제 신앙으로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참여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신앙으로 곤경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가까이 가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도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인도하는 다리, 명백하게 드러나고 무너지는 지상 나라에서 번쩍이는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세에서는 항상 사물의 한 단면 곧 가난의 곤경과 어둠만이 보입니다. 가난의 축복과 행복, 새로운 삶과 나라는 아직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는 가난으로 늘 더 나아진 것이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더 나아질 것이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가난이 지닌 행복은 오직 신앙으로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셨던 분과 신앙으로 일치할 때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이지, 소유물에 대한 관심으로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보증받지만, 여기에는 분명 신앙과 인내가 요구됩니다.
가난에서 싹트는 사랑
이러한 신앙으로 인해 최선을 다해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우리에게 결코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무능과 게으름을 위한 핑계 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필요한 이런 모든 노력이 계속하여 헛되이 끝나는 곳에 바로 십자가에 대한 신앙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약속되고 시작됩니다.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많은 일들 곧 교회 생활에서 외적 일들과 내적 일들이 생깁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와 가난과 내적으로 일치하기 위해 우리에게 가능하고 주어지는 범위 안에서 구체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금욕의 의미이며, 이러한 뿌리로부터 복음적 권고들도 생겨났고, 주님께 봉헌된 가난한 신분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도자의 신분입니다. 이 신분을 통하여 그밖에 교회 전체 안에서 감추어진 생활이 모든 이를 위한 표징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인간의 가난과 곤경에 대해 특별히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하는 규율이 항상 새롭게 이해되고 내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항상 작은 양 떼이어야 하기 때문이며(루카 12,32 참조),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양들과 같기 때문입니다(마태 10,16 참조). 교회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8-11).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우리가 익숙하게 그리고 일상적인 의미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곧 우리와 함께 사는 그들에게도 신성하고 위대한 빛이 비추어집니다. 눈에 보이는 가난한 사람, 병자, 마음이 부수어진 사람 등은 가시적으로 우리 주님의 가난과 더 닮아 있기 때문에 항상 교회에 더 충실했습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의 개인적 존엄성과 그다지 관련이 없는, 완전히 객관적인 장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성호를 그으며 결국 행동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곧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가난한 영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일(히브 9,14 참조)입니다. 곧 주님이 당신의 가난과 우리 모두의 가난에 의미와 충만과 부유를 베풀어주셨던 사랑의 영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부유는 이제 가련한 세상의 어둠을 물리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무언가 고요하고 엄청난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순수하고 자유롭게, 모든 십자가와 내적인 곤경을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내맡기는 것이 요구됩니다. 가난에서 그렇게 우리와 결합된 이웃과 친교를 나누면서 이러한 사랑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이는 우리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난한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이유는 그가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감각은 우리 안에서 결코 무디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서 가난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의 내적이고 신적인 자유에 참여하게 하셨고, 그 자유는 모든 무자격을 넘어서고, 인간의 모든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힘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해방하고 구원하고 변화시키고 쇄신하는 힘이 나옵니다. 그 힘은 가난한 사람의 마음과 내적 곤경을 어루만지고 세상을 안으로부터 변화시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가난 한가운데서 사랑받는 것, 사랑받는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의 빛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다시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을 흡족하게 여기고, 그런 찾음으로 그는 매우 풍요롭고 자유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 그는 근본적으로 다스리는 더 높은 원천의 권능을 만납니다. 곧 당신의 가난에도 절대적 한계가 없는 하느님 나라의 권능을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 안에서 살아 있고 활동하는 사랑은 아직 잠정적이고 어두운 이 세상을 영광스럽게 변화시키는 하느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는 고유한 빛과 가장 순수한 표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서로 나누는 사랑을 통해 나타나는 빛은, 이 세상의 어둠 안에서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부유와 위대한 광채를 두루 밝게 비추어줍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이 설명하고 있듯이, 그 사랑의 빛은 순수한 모든 가난이 마침내 거룩한 십자가의 은총을 통하여 다다르는 충만한 은총을 두루 비추어줍니다. 신약성경 메시지의 마지막에는 가난이 아니라 부유가, 나약함이 아니라 능력이, 가련함이 아니라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유와 능력과 충만함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지 나약한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나라는 이루어지고, 이와 더불어 하느님께 반항하는 인간적인 모든 거짓 업적과 거짓 나라 그리고 절망적인 엄청난 거짓 등이 심판을 받고 마침내 궁극적인 승리가 이루어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산상설교의 행복선언은 묵시록의 환시에서 비로소 그 궁극적이고 최상의 광채를 얻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주님은 우리의 모든 길과 운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합하고 알맞은 가난으로 우리를 해방하시고, 현세적으로 보잘것없는 우리의 사랑을 당신 빛으로 밝혀주십니다. 그리하여 거짓이 아니라 진리가 인간의 가난을 다스리고, 그 진리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된 권능 곧 주님의 사랑이 실현되기를 바라십니다.
* Bernhard Welte, “Vom Sinn und vom Segen der Armut”, in: Bernhard Welte, Was mich glauben läßt. Meditationen, Frankfurt am Main 1991, 83-106 본문에 있는 소제목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