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제77호(여름) 신앙의 오솔길
본문
모든 아침은 우리를 새 삶으로 초대한다
모든 행복을 맛보는 데는 하루면 충분하다.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는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에서 중병을 통해 온전하게 회심했던 젊은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병을 깊이 앓다가 하느님을 제대로 만났고 인생의 본질적인 의미를 발견했다. 그 결과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누구나 정말 모든 사람, 모든 것에 대해서 죄가 있는 거예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아플 정도로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그걸 모르고 화만 내며 살아왔을까요?” 그는 잘못되어 가는 세상에 대해 책임을 크게 의식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유쾌한 마음도 잃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더욱더 즐겁고 사랑에 충만한 마음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의사가 왕진했을 때, 그는 의사에게 “어떻습니까, 선생님, 제가 하루쯤 이 세상에 더 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하루가 뭐요. 여러 날 더 살겠소. 아니 여러 달, 여러 해 더 살겠소.” 하고 의사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소리쳤다 “여러 달, 여러 해는 뭡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날수를 헤아리는 겁니까? 인간이 모든 행복을 맛보는 데는 하루면 충분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고 서로 허세를 부리며 서로 앙심을 품는 것일까요? 차라리 곧장 정원에 나가(…) 서로 사랑하고 칭찬하고(…) 우리의 인생을 축복하는 게 어때요?” 이에 의사는 그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아드님은 오래 살지 못할 거 같습니다. 병으로 정신 착란 증세까지 보이고 있군요.” 하지만 의사는 그 젊은 환자가 행복을 누리는 참된 이유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젊은이는 방 창문을 통해 정원을 바라보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 주위엔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구나. 새, 나무, 풀밭 그리고 하늘! 하지만 나 혼자만이 치욕 속에 살면서 나 혼자만이 모든 것을 더럽히고 이런 아름다움과 영광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구나.”
‘모든 행복을 맛보는 데는 하루면 충분하다.’ 왜 그런가? 하루는 인생 전체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사실 매일 아침은 작은 탄생이며, 매일 낮은 작은 인생이며, 매일 저녁은 작은 죽음이다. 이 가운데 아침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가 아침을 체험하는 방식과 양식은 그날 하루의 일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든 행복을 하루에 충분히 맛보기 위해 아침에 맞아들여야 하는 고유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떠오르는 태양의 빛과 따뜻함이다.
모든 일출은 우리에게 놀라운 메시지를 준다.
매일 아침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오히려 이를 놀라운 기적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일출에 깃든 메시지를 감동하며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일출이 항상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빛이 모든 어둠을 새롭게 물리치고,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해 인내심을 잃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새 날과 함께 새 땅으로 들어가기를 초대하신다는 메시지가 깃들어 있다. 그분은 매일매일 우리를 아무도 밟지 않았던 곳으로 초대하신다. 그러기에 매일은 그저 평범한 날이 결코 아니다. 매일은 이전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그리고 태양이 저녁에 지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그런 날이다.
따라서 일출이 우리의 의식에 깊이 각인시키는 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준비하고 행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곧 강력하고도 찬란한 것, 예측할 수 없으면서도 무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무언가가 분명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야기한 젊은이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 행복한 상태에 다다랐다. 이러한 행복 상태에서 위대한 작곡가들은 아침의 체험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요컨대 요셉 하이든Joseph Haydn(1732-1809)의 심포니 6번 르 마땡Le Matin(아침)이 그것이다. 저명한 화가들도 아침을 주제로 삼아 예술 활동을 폈다. 조르주 루오Georges-Henri Rouault(1871-1958)는 자신의 판화집 ‘미세레레’(1948년 발표)에 “아침을 노래하라. 날은 반복된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역시 동일한 행복 상태에서 많은 작가들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아침 찬미가를 지었다.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1856-1950)의 다음 말에도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우리가 삶 자체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만큼 종교에 더 깊이 몰두한다.”
물론 우리는 날이 샐 때에 기쁨과 환희를 아주 어렵게 느끼는 많은 사람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하루를 시작하는 여명과 함께 많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해가 떠오를 때 그들에게는 많은 물음이 떠오른다. 나의 오늘 하루는 어떻게 될까? 나는 오늘 어떻게 근심과 걱정을 해결해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다 해결하고 처리할 수 있는가? 그들에게 슬픔과 혐오가 아침에 동시에 밀려온다.
바로 이러한 인물에 속하는 사람이 엘리야 예언자다(1열왕 19,9-18 참조). 그는 호렙 산에 있는 동굴 속에서 힘겹게 밤을 지냈다. 하지만 밤의 고요도 그의 걱정을 몰아낼 수 없었다. 아침에 주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는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잃었다고 대답했다. 실패와 실망, 아픔과 불안 등에 사로잡혀 그는 어두운 동굴 속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엘리야야,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라.” 그러자 엘리야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빠져나와 길을 나섰다. 하느님의 이 말씀은 하루를 마치 광야의 여정처럼 힘겹게 시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지 않는가?
“일어나라. 허리띠를 매고 가라.”
같은 맥락에서 시몬 베드로가 시련을 겪었던 일정한 상황이 생각난다. 헤로데 임금은 베드로를 잡아들였다. 그리고 그를 백성에게 넘겨 제거할 작정이었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일어나라. 허리띠를 매고 가라.’ 베드로가 일어서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천사는 앞장서고 베드로는 뒤따라갔다. 그들이 감옥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베드로는 그때에 정신이 들어 지금 일어난 사태를 알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사도 12,1-11 참조)
엘리야의 이야기와 베드로의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두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작가 만프레드 하우스만Manfred Hausmann(1898-1986)은 하느님께서 사건들을 인간과 달리 보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결말에 감추어져 있는 새로운 시작을 아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에는 몰락과 어둠만 보이는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신다. 엘리야는 자기 삶이 마지막에 이르렀다고 믿었지만,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겨주신다. 엘리야가 어두운 동굴 속에 앉아 있을 때 위대한 신비가 준비된다.”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최선을 다하다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 직접 개입하신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최선을 다하다가 한계에 이르러, 그만 포기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될 때에 비로소 개입하신다. 그리고 바로 그런 순간에 하느님께서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1코린 2,9 공동번역 성서)하신다.
작가가 엘리야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베드로에게도 해당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일어나라. 허리띠를 매고 가라!’ 하느님의 이러한 말씀은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잠자는 우리를 일깨우는 것만이 아니다. 특히 내적으로 일어서도록 우리에게 힘을 준다. 사실 내적으로 일어나는 사람만이 늘 깨어 있으면서 희망에 넘쳐 용기 있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일어나라. 허리띠를 매고 가라!’는 하느님 말씀의 힘으로 우리가 자신의 어두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일어설 때, 비로소 우리를 구속했던 쇠사슬이 떨어져 나간다. 낙심, 권태, 무관심, 실패, 불쾌, 체념 등의 쇠사슬이 떨어져 나간다. 그러면 우리도 하루의 경과 중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제야 나는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 손으로 나를 이끌어주셨다.’
이로써 더욱 분명해지는 점은 아침 시간이 결정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결정은 아침을 비로소 아침으로 만든다. 아침에는 하루를 위한 힘이 있다. 신앙인은 새로운 하루가 무엇을 가져다줄지,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지, 어떤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지, 어떤 순간에 선을 행해야 할지를 살피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내맡긴다. 하느님께서 이 새로운 하루를 온전히 인도하시도록 우리의 삶 전체를 그분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신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하루의 주인이 되신다.
이에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aurdini(1885-1968)는 이렇게 말한다. “하루의 첫 시간이 얼마나 결정적인가!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하루를 시작 없이 시작할 수도 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날에 그저 흘러 들어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도대체 ‘하루’라는 날이 아니라 아무 뜻도 모습도 없는 시간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는 뚜렷한 의향을 요구하는 하나의 일이다. 하루는 나의 일생이기도 하다. 나의 일생도 하루라 할 수 있다. 거기에도 어떤 모습이 있어야 한다.”(『거룩한 표징』, 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