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제69호(여름) 신앙의 오솔길
본문
오늘날 어디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가?
1.하느님은 어디로 갔는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1844-1900)는 『즐거운 학문』에서 밝은 오전에 등불을 켜 들고 장터에 나와 “나는 신을 찾고 있다! 나는 신을 찾고 있다!” 하고 끊임없이 외쳤던 어떤 기인畸人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시 장터에는 신을 믿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 기인은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도대체 신은 사라져 버렸는가?” 하고 물었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물었다. “신은 어린아이처럼 길을 잃어버렸는가? 신은 우리가 두려워 숨어 버렸는가? 신은 배를 타고 우리 세계를 떠나버렸는가?” 이렇게 그들은 서로 외치며 비웃었다.
그러나 그 기인은 분노하며 그들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그들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그리고 그는 그 엄청난 사건에 직면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연거푸 질문을 제기했다. 마침내 그는 등불을 땅바닥에 내동이 쳐, 등불은 산산조각 났고 불은 꺼져버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내가 오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 기인의 외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마음 깊은 곳에서 간혹 큰 번민으로 제기하는 물음인데, ‘도대체 나는 이 세상 어디에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가?’이다. 가끔 우리도 그 기인처럼 생각하고 외치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까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 현실에 아주 힘들게 적응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도 하느님이 실제로 배를 타고 우리의 세상에서 떠났다는 느낌을 받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분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할 때에 어떤 비현실적인 것을 대한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가? 우리와 무한히 멀리 계시는 듯이 보이는 이러한 하느님이 과연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우리 가운데 조심스럽게 묻지 않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이러한 흔들리는 감정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서나 하느님의 활동을 느꼈기 때문에,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살고 있던 세계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아도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가꾸고 완성할 수 있다는 인상마저 받는다.
2.하느님은 어디에서 체험할 수 있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순수 지성적으로만 헤아리는 것은 그리 유익하지 않다. 하느님을 자신의 삶 안에서 혹은 자기 삶의 역사 안에서 실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이 어디에 계신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하느님을 오늘날 실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가?’ 하고 물어야 한다.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가장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느님이 우리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태도와 반응과 동기 등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외부에 드러낸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알려져 있고, 주변 사람들도 우리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과 다른 분이다. 벌써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은 하느님이 우리가 도저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달리 말하자면 하느님은 절대적인 초월자이다. 그분은 세속적인 모든 것과 전혀 다른 존재이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 인간과 절대로 비교할 수 없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분, 완전히 다다를 수 없는 분이다. 우리 인간은 오직 대상적인 것 곧 있는 것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세상의 사물처럼 대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찾으려는 사람은 먼저 그분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다 한 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신비롭게 숨어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체험과 더불어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신앙이 시작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약성경의 이사야서는 가장 분명하게 이렇게 말한다. “아, 구원을 베푸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정녕 당신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이십니다.”(이사 45,15) 여기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역사 안에서 숨어서 활동하시는 분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느님의 이러한 ‘익명성’은 실제로 당신의 강생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친히 가장 단순하면서도 집약적인 비유로 말씀하신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당시 사람들은 도둑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귀중한 동전이나 보석을 항아리에 담아 땅에 파묻곤 하였다. 그러니까 귀중품이 땅에 숨겨진 것인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그 보물에 비유하신다.
그런데 왜 하느님은 그렇게 숨어 계시는가? 그분도 무언가를 두려워하시는가? 우리는 모두 낙원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이 이야기가 현대의 관점에서 완전히 뒤바뀐 것으로 보인다. 그 낙원 이야기에서 인간은 숨어 있었고 하느님이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인간을 찾으셨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드물지 않게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하느님,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이러한 점을 더 숙고하기 위해 우리는 숨어 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더 깊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숨어있음을 보물 곧 귀중한 선과 관련시킨 것은 그냥 하나의 우연일 뿐인가? 그 숨어있음은 참된 보물에 대해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는 내적 특징이 아닌가? 그러니까 참된 보물은 감추어져 있지 않으면 진지하게 언급할 수 없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이러한 점들을 우리는 훌륭하고 선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자주 체험한다. 말하자면 겸손하고 모범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훌륭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숨기는 것이다.
사실 선은 가끔 작열하는 불꽃처럼 힘 있고 강렬하게 자신을 나타내지만 이내 사라진다. 선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선은 이기적인 사람과 달리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뒤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다시 말하면 선은 업적 앞에 자신을 강조하여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기심을 버리고 업적 뒤로 물러난다.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물음을 처음으로 대답할 수 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 안에 현존하신다. 그분은 빵과 같이 선한 분이다. 빵은 자기 자신을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빵은 그야말로 인간에게 헌신하기 위해 존재한다. 곧 인간에게 먹히고 사라진다. 그러니까 적지 않은 사람이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을 정도로 그분은 업적 뒤로 숨으신다. 예수님을 바라보자. 어디에서 그분을 찾을 수 있는가? 그분은 당신 말씀 뒤, 당신 성사들 뒤에 숨어 계신다. 성령을 바라보자. 그분은 어디 계시는가? 그분은 당신 교회 안에 계신다. 선을 행하는, 사랑하는 모든 사람 속에도 계신다.
숨어서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이 선의 특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낙관주의의 태도를 취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선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선한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선한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선한 것에 대한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증이라면(히브 11,1 참조), 우리는 감추어져 있는 선에 대해서도 믿어야 한다.
3.하느님은 숨어 계시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최상의 선이다. 그분은 비유가 언급하는 것처럼 귀중한 보물과 같다. 그러기에 그분은 또한 숨어 계시는 하느님이다. 그렇게 숨어 계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그렇게 그분을 찾고 추구하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비유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도록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는 비유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숨어 계시는 존재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밭은 무엇을 뜻하는가? 밭은 우리의 일상 삶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상징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느님은 우리 일상 삶의 돌밭에 숨어 계신다.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이 우리 삶의 일상 속으로 내려오신 그 이후부터, 그분은 우리가 일상적인 의무를 채우는 아주 작은 일과 보잘것없는 일에서 찾아지기를 원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일상의 작은 일이나 그 자체로 가벼운 일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작고 가벼운 일에 바로 하느님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1904-1984)는 대가답게 탁월한 몇 가지 질문을 제기했는데, 이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이 실제로는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이 계시는지를 의식하도록 도움을 준다. “비록 우리가 변명하고 싶었을지라도, 우리가 부당하게 취급받았을지라도… 우리는 침묵한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선하게 대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타인을 위해 헌신했는데도 보상받지 못한 적이 있는가?” 우리가 이런 식으로 성실하게 머물렀던 순간들을 우리 삶에서 헤아려보면, 우리가 보잘것없이 보이는 그때야말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계셨던 순간임을 인정할 것이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물음이 궁극적으로 유래하는 공통적인 근원을 깨달을 수 있다. 모든 물음은 사랑이 우리 자신에게 다다랐던 우리 삶의 순간들을 되찾는 노력이다. 하느님은 그 깊은 본질에 따라 사랑이기 때문에, 그분은 무엇보다도 사랑 안에서 곧 다른 사람을 위한 삶에서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이기주의자는 이런 생각을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없다.
‘밭에 묻힌 보물’의 비유에서 날품팔이가 쟁기로 뜻밖의 보물을 찾았을 때, 그가 취한 반응을 상상해보자. 처음에 그는 아마 화를 냈을 것이다. 보물에 걸려 쟁기질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쟁기가 예기치 않게 이런저런 저항을 받았을 때 우리도 자주 불평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하느님은 가장 불확실한 것 속에 숨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여기에서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을 순응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신체의 여러 불편함을 초래하는 나이 듦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었을 때 외로움을 받아들여야 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개선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의학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치병도 받아들여야 한다. 바로 이런 순간들이 우리에게는 삶의 쟁기질을 계속할 수 없는 초라한 상태이지만, 이때야말로 하느님 홀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는 순간이다.
어린 자녀 둘을 둔 어떤 부인은 어느 날 병원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암이 말기에 접어들어 이제 그가 두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충격적인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 답은 부인의 다음 진술에서 찾을 수 있다.
“저는 제 죽음이 선고된 그 날부터 날마다 하느님께 제 어린 자녀를 위해 조금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지금도 계속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에 제 자녀와 집, 태양과 거리 등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굉장히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뜹니다. 그때부터 저는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봅니다. 저는 간혹 거리를 거닐며 모든 대문과 입구 등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저는 마치 그것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듯이 집중적으로 주시합니다.”
부인의 이러한 진술과 태도에서 우리는 그가 충격적인 소식을 기꺼이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가장 귀중한 보물까지도 찾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에게는 하느님 홀로 가장 중요했다.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이처럼 다가오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숨어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이를 통해 내적 행복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