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백합 제68호(봄) 신앙의 오솔길
본문
사랑하는 사람은 내어주길 원한다
1.모든 사람은 하늘의 선물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상대에게 무언가를 내어주길 원한다. 그런데 그렇게 선물하려는 갈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에 대한 깊은 근거는 인간의 존재 자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본래 하나의 선물이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하나의 선물로 베풀어진, 선사된 존재이다. 그러기에 상대에게 무언가를 선사할 수 있고, 나아가 자기 자신마저 선사할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은 누구에게서 선사된 존재인가? 부모에게서 선사되었는가? 외적으로 보자면 부모가 낳았으니, 인간은 당연 부모에게서 선사된 존재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피상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인간적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조금 열거해보자.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세포 하나가 어느 날 한 인간 곧 장성한 인간이 되는데,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그 작은 시작이 어떻게 고통을 겪고 기쁨을 누리며, 사랑하고 증오하며, 생각하고 기억하고 무언가를 늘 상상하는 존재로 자랄 수 있는가? 그 작은 존재가 어느 날 선과 악을 인식하고, 이 둘을 서로 구분하는 양심을 가지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느님께 경배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볼 정도로 성장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자신의 유일무이한 존재 곧 그가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그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이 어디에서 오는가?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인간은 단지 그 부모의 작품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그 부모의 흔적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흔적이 훨씬 더 많다. 부모는 분명 자녀를 원했다. 하지만 누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정말 바라고 원했는가? ‘있는 그대로의 나’가 태어나고 존재하는 것은 나의 부모가 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나를 원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러니까 부모는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협력한 것이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자녀를 낳은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 부모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사실 하느님께서 인간의 탄생과 성장을 신비로운 방식으로 주도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의 이런 선물에 대해 우리는 단지 놀랄 뿐이다. 많은 부모는 하느님의 이런 선물을 자신의 가슴에 안고 있으면, 그저 놀람에 사로잡힌다. 시편 작가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 놀란 나머지 139편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정녕 당신께서는 제 속을 만드시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습니다. 제가 오묘하게 지어졌으니 당신을 찬송합니다. 당신의 조물들은 경이로울 뿐. 제 영혼이 이를 잘 압니다.”(시편 139,13-14)
마찬가지로 마카베오 후서의 한 어머니도 같은 생각을 말한다(2마카 7,1-42 참조). 그 어머니는 일곱 아들을 두었다. 그들은 모두 안티오키아 4세 치하에서 유다인들에게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를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죽기까지 율법을 충실하게 지킨다. 그들은 의연한 용기를 요구했던 어머니의 눈앞에서 힘겨운 고문을 당하며 죽음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언한다. 그들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더렵혀지지 않은 채 죽어 갔던 것이다. 마침내 “그 어머니도 아들들의 뒤를 이어 죽었다.”(2마카 7,41)
이 어머니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고결한 정신으로 가득 찬 그는 여자다운 생각을 남자다운 용기로 북돋우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2마카 7,21-23)
이런 확고한 증언은 위에서 소개한 성경의 두 곳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은 부모에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베풀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다.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이 왜 서로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선사된 존재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편에서 항상 상대에게 무언가를 선물하려는 갈망이 있다.
2.간혹 그대에게 그대 자신을 선물하여라.
이 자리에서 우리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1090-1153)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다음의 권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자주 당부하는 것도 아니라 아주 드물게 권고하는 바이지만, 그대는 그대에게 그대 자신을 선물하시기 바랍니다.” 이 권고에는 성 베르나르도의 인간적인 모습이 잘 드러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대 자신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가끔은 그대에게 그대 자신을 선물하시기 바랍니다. 그대 자신을 호의적으로 대하고, 그대 자신을 조신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대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는 인간 행동의 근본양식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그대는 그대 자신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방식으로 그대는 하느님과도 이웃과도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대 자신과 하나가 될 경우, 그대의 마음은 진정 기쁨의 샘이 되고, 무언가를 이웃에게 선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물에는 규칙이 있다. 가치가 없다고 여긴 물건을 내어주는 사람은 오히려 상대를 모독하는 것이지 진정으로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아끼는 것, 자신이 소중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것, 자신의 마음에 드는 물건을 내주는 사람은 정말 선물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오스트리아 작곡가 슈베르트(1797-1828)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슈베르트에게 어떤 지인이 찾아왔다. 슈베르트는 방문한 손님에게 모차르트의 F단조 교향곡 악보 원본을 보여주었다. 슈베르트는 당시에 생존하던 모차르트(1756-1791)에게서 그 악보를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당시 슈베르트와 그 지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인은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는 그 교향곡을 함께 연주했습니다. 슈베르트는 나에게 더 큰 기쁨을 주기 위해 모차르트의 손때가 묻어 있는 그 악보의 원본을 나와 함께 절반씩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나눔을 통해 우리 둘이 그 영원한 작곡가를 항상 기억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제공된 그 악보 원본의 절반을 거부했고, 그 악보를 절반으로 나누는 것 자체를 반대했습니다.”
슈베르트가 지인에게 악보의 원본 전체가 아니라 단지 절반만을 내주는 모습에서 그가 그 악보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지인은 악보 원본을 나누어 절반만 소장하는 것이 온전한 예술작품을 파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자 슈베르트는 그 악보 원문 전체를 지인에게 넘겨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슈베르트의 넓은 마음과 배포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진정한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선물을 통해 타인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려는 사람은 먼저 무언가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에게는 넓은 마음이 있어야 하고, 통 큰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넓은 마음으로 자신이 아끼는 것을 상대에게 내주는 사람은 실제로 상대에게 큰 기쁨을 줄 뿐만 아니라 그 선물의 결과로 자기 자신의 마음도 충만해진다.
도미니코 성인(1170-1221)이 스페인 팔렌시아Palencia에서 학생으로서 신학을 공부할 당시, 그 일대에 엄청난 기근이 닥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는 이런 비참한 재앙을 외면할 수 없었다. 성인은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과 사랑에 불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책들마저 팔았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나누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가는 끔찍한 재앙에 직면하여 저는 편안하게 공부할 수 없습니다.” 이후에도 도미니코 성인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물건을 두 번이나 더 팔았다고 한다.
3.선물의 기술
유머작가 오이겐 로트(1895-1976)는 선물의 기술을 아주 짧게 두 구절로 묘사한다. “그대는 많은 것들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선물하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기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선물하는 이유이다.
요한 23세 교황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바티칸에서 난민으로 살았던 어떤 여자는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제 남편은 당시 이스탄불에서 론칼리Roncalli 대주교로 불렸던 그분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론칼리 대주교는 자신의 젊은 직원 하나가 난민이었기 때문에 이스탄불에서 나치에 의해 체포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그 직원을 바티칸의 직원으로 채용했던 것이다. 론칼리 대주교는 나중에 교황이 된 다음, 그 직원과 난민 여자가 매우 서로 사랑하고 있으며 혼인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교황은 그들의 혼인식을 주례하였고 혼인 선물까지 마련하였다. “그분은 저희에게 은으로 된 작은 상자 하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안에는 묵주나 기념메달이 아니라 신혼여행에 필요한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분이 요한 23세 교황이십니다.”
젊은 신혼부부는 그런 선물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예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상황에 아주 긴요하게 꼭 필요한 것을 선물하였다. “바로 이런 분이 요한 23세 교황이십니다.”라는 표현에서 그 선물을 받은 신혼부부의 기쁨이 잘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이 표현은 요한 23세 교황이 아우구스티노의 다음 진술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사랑만이 상대에게 무언가를 내어주면서 동시에 스스로 부유해지는 신비를 이해합니다.”
상대에게 무언가를 선물하려는 사람은 먼저 상대를 기쁘게 하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한 선물은 돈으로만 살 수 없다. 갑자기 발견될 따름이다. 미국의 서정시인 발트 휘트만(1819-1892)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선물을 한다면, 나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선물에는 선물하는 사람의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물을 받는 사람의 마음에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물은 항상 마음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많은 선물은 좋은 기억들을 일깨우고 행복한 시간을 다시 체험하게 한다.
많은 작가들은 설명과 이야기를 통해 선물의 가치를 표현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부요해진다고 말한다. 내어준 선물은 결코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하는 사람의 삶을 더욱 부요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