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의 작은 교회 공소를 찾아서(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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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2-08-09 조회 1,430회본문
무풍지역은 우리나라 십승지지十勝之地(나라 안에서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열 곳)의 하나로 지목된 왕족들의 숙소인 명례궁이 있을 만큼 풍광이 수려하다. 지금은 궁터에 무풍공소가 들어서고 민가가 들어서면서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무풍면 읍내 시장 뒤편 마을에 위치한 무풍공소(무주성당 관할, 주임=최종수 신부)에 들어서니 자연석으로 둘러싸인 성모상과 예수상이 순례객을 반겨준다. 산골짜기마다 선조들의 신앙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무풍공소는 자연적 땅은 척박하지만 신앙적 토양이 비옥해 수도자 4명을 배출한 무주에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공소이다.
매월 넷째 주일 오후 3시에 공소 미사가 있으며 세대수는 23가구이고 신자 수는 30여 명이다. 병인박해(1866년)이전 여우내를 비롯한 깊고 험한 골짜기 교우촌에 최양업 신부님과 경상도 지방에서 전교하던 다블뤼 신부님이 복사 이양여를 데리고 순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병인박해 이후로 신자들이 자취를 감추어 1878년 전라도로 피신 온 볼랑 신부님과 무주 지방 전교를 시작으로 여우내, 무풍 등에 신자들이 다시 모여 화전을 일구며 신앙생활을 유지해오다 1883년 로베르 신부가 금산성당을 모 본당으로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잠시 머물다 가는 장소여서인지 1900년에서 1940년까지 생업을 찾아 타지로 떠나는 신자들이 많아 무주 지방 교세는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그 후 소멸의 위기에 놓인 공소에 다시 불씨를 댕긴 사람은 이분이(아가다)자매이다. 한국 전쟁 때 서울에서 철목리로 피난 와 살던 아가다 자매는 원래 개신교 신자로, 천주교로 개종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북리로 이사와 오두막을 얻어 본격적으로 전교를 시작했다. 열심한 전교로 혼자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나오면서 신자 수가 날로 늘어났다.
이처럼 아가다 자매는 공소회장으로 오랫동안 공소를 지키며 신자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날로 신자가 증가하자 현내리 신자들은 1954년 북리에 공소로 사용할 집을 매입하고, 금산성당의 김영태(도미니코)신부가 판공성사를 다니면서 공소가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 후 1956년 4월에 설립된 무주본당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7년 3월에 북리에 있는 공소를 판 대금과, 6.25 전쟁 후 공소 별로 나온 옥수수 가루, 옷 등 구호물자를 아껴 모은 돈으로 현재의 공소 건물과 대지를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하고 있다. 1974년에는 부녀회를 구성하여 공소 천정 보수공사를 했으며, 1975년에는 평신도사도회, 그 이듬해에는 신학생후원회를 조직하였다.
1983년 이상섭(모이세)신부 지도로 ‘신자들의 도움 pr.’이 창단되었으나 3년 정도 활동을 하다가 없어지고, 다시 1997년 ‘하늘의 문 pr’이 창단되었다. 봄이 되면 농사일이 바빠 중단하다 재개하는 등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연령대가 50대~70대인 ‘청년들의 모임’이 공소 관리와 주변 미화 작업을 하고 있다.
現 공소회장 한봉환(다니엘)형제는 “지금 예수상이 있던 자리에 원래는 종탑이 있었다. 오래되어 위험한 종탑을 철거하고 괴목공소를 폐쇄할 때 예수상을 모셔왔다. 공소 건물이 노후되어 보수를 하여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잘 관리하여 신앙유산을 보존하고 싶은 마음뿐이다.”는 바람을 말했다. 많은 공소들의 복합적인 현상을 보며 노후된 공소를 어떻게 후손에게 남길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취재 | 김도숙 율리엣다(교구 기자단), 사진 | 손종식 도미니코(교구 가톨릭사진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