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의 작은 교회 공소를 찾아서(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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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2-05-03 조회 1,459회본문
진흥공소(정읍시 감곡면 석점1길 43-1 석점마을)는 신태인성당(주임=송광섭 신부) 관할 공소로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가다 보면,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는 공소의 뒷모습이 보인다. 마당 한편에는 하얀 성모상이 방문자를 맞이한다.
현 공소회장인 차상철(야고보), 김귀례(바울라) 부부와 자매님 두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진흥에 사는 사람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으나 생활이 어려워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신자들은 1년에 4번, 대축일에 성당으로 미사를 가는 것이 교회 활동의 전부였다. 석점마을에 신자들이 활성화된 것은 정읍시 산내면 삼바실에 살던 방흥석(안드레아, 초대 공소회장) 형제가 이사 오면서부터였다.
방흥석 형제는 한때 산내면 회문산에서 김대건 신부의 동생인 김난식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점토가 많이 나와 점촌이라고도 하였는데 옹기그릇을 만들기에 적합하여 공장을 세우고 옹기를 만들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옹기를 팔아 생계유지에 큰 도움을 받았고, 방흥석 형제는 신자들과 옹기를 팔아 어렵게 살면서도 전교에 힘을 기울였다. 1953년 방흥석 형제는 옹기 공장과 옹기점을 신용운(베드로) 형제에게 인계하였고, 신용운 형제는 옹기 공장을 인수하면서 공소회장도 맡게 되었다. 또한 적극적인 전교 활동으로 신자 수가 늘자 자신의 집에서 공소 예절을 하고 판공 때는 미사도 드렸다. 그 당시 옥단공소와 화봉공소 신자들도 이곳으로 와 함께 미사를 드렸다.
1954년 이후 구호물자가 교회에 들어오면서 당시 형편이 어려웠던 마을 사람들의 많은 수가 입교를 하였으며,이후 많은 신자들로 활성화되자 공소 건물의 필요성을 느낀 신 베드로 형제는 기금 모금을 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공소회장을 그만두게 되어, 그 후 새로 선출된 차몽선(말구) 형제와 더불어 공소 신축이 추진되었다. 신자들은 생활하기도 어려웠지만 형편에 따라 조금씩 분담하여 부지를 마련하고 1974년 신축을 시작했다. 신자들은 힘을 합쳐 벽돌을 쌓고 노력 봉사했으나 생활이 어려워 끝까지 함께 할 수 없었다.
공사를 하는 동안 차몽선 형제는 며느리(현 회장 부인)인 김귀례(바울라)자매에게 일꾼들 밥을 해주도록 부탁하였다. 김귀례 자매는 임신한 몸으로 힘들었지만 공소가 지어진다는 기쁨에 힘든 줄도 몰랐다고 그때를 회상하며, 임신 중이던 아이가 공소 신축된 해에 태어나 공소와 나이가 같다고 한다.
신태인성당 제5대 주임 故 이종원 토마스 신부와 본당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공소가 신축 되었다. 대지 150평에 건평 50평의 아담한 공소가 신축되어 1977년 9월 김재덕 아우구스티노 주교(전주교구 제5대 교구장)를 모시고 성대하게 축복식을 가졌다. 그때가 진흥공소가 가장 활기차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어렵게 지은 공소는 보수를 해야 할 곳이 많았다. 1989년 20대 유장훈 몬시뇰이 재임 시에 차상철 형제가 공소 보수를 하게 되었다. 빗물이 새는 지붕을 고치고 내부 공사로 낮은 천장을 높였으며 시멘트 바닥이던 공소안을 마루로 개조했다.
나이 든 신자는 모두 세상을 떠나고 조금 젊다 하는 신자들은 냉담을 하며 현재 대여섯 명 만이 미사 참례를 하는데 그마저도 전화해서 참례를 유도해야 한다고 한다. 냉담 신자가 많고 코로나로 인해 신자들이 거의 미사 참례를 하지 않고 있어서 차상철 형제는 근심이 크다. 김귀례 자매는 중단된 레지오 모임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라고 말한다.
마을 전체 주민이 줄고 젊은이가 없어서 신자는 더 늘지 못하지만 냉담자들이 돌아와 공소가 옛날의 활기 넘치는 공소로 활성화되어 역사가 이어지기를 희망해본다.
취재 | 이선숙 데레사(교구 기자단), 사진 | 원금식 대건 안드레아(교구 가톨릭사진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