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의 작은 교회 공소를 찾아서(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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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1-05-04 조회 1,613회본문
김제시 용지공소는 신풍성당(주임=김영복 신부)관할 공소이다. ‘김제시 용지면 용지로 664’에 위치한 용지공소는 농경지와 축사 그리고 주택 사이 들판에 우뚝 서 있다.
공소미사 시간 30분 전 울리는 종소리는 미사의 시작을 알린다. 몸이 불편하여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는 신자들은 이 종소리를 시작으로 집에서 미사를 대신한다. 용지공소는 한국전쟁으로 가족을 북에 두고 남한을 찾아 군산항에 내린 황해도 은율 실향민들이 모인 곳이다.
이곳은 당시 정부 방침에 의해 피난민 정착 농원으로 지정되었다. 이병근(분도) 원장이 주축이 되어 황무지를 개간하고 포도, 배, 사과, 인삼 등의 농작물과 소, 돼지, 닭을 키우며 전북 축산업에 40%를 생산했다.
1955년 이 분도 원장이 여섯 명의 신자를 사무실에 모아 주일 참례를 하다가 김제 요촌성당(전 김제본당)김종택(요셉)신부께 보고 함으로써 용지공소가 되었다.
용지 신앙공동체는 타 종교의 모범이 되었고 실향민촌 사무실을 인수받았다.
이때 가톨릭복지위원회에서 구호물품을 무상으로 분배하여 입교자가 크게 늘었다. 전쟁 후 전교의 대상이 된 실향민들은 정신적으로 위로받기 위해 주님을 찾았다. 1955년 6월 20일 건평 25평 흙벽돌로 강당을 세우고 교회 사택 4칸 목조건물 1동을 건축했다.
공소 1대 회장인 원현식(분도) 형제 이후로 이 분도 원장이 서울로 가면서, 2대 공소회장인 백기택(알벨도) 형제를 초빙하여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범석규(마티아) 신부 재임 시(1960~1963) 강당 지붕을 함석으로 덮은 후 공소 활성화를 위해 힘썼으며, 3대 공소회장 문도석(베드로) 형제는 1971년 교회 답 1,152평을 매입하여 1974년 11월 24일 사택에 수도자 방을 꾸몄다. 또한 교회 신축허가를 위해 쌀계(50가마)를 조직하여 어려운 여건임에도 공소를 신축한다는 설렘과 기쁜 마음을 가지고 봉사하기로 다짐했다.
4대 공소회장 정원섭(다두) 형제 때 현 공소가 건립되었고 1981년 쌀계에서 탄 50가마를 가지고 교회 신축기금과 본당 특별헌금으로 공소를 신축하였다. 1982년 9월 19일 박정일 주교(제6대 전주교구장)주례로 신축건물 축복식을 거행했다. 공소 50가구 신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힘을 보태어 새 성전을 봉헌하였다. 이들은 이곳을 복음 전파의 터전으로 가꾸어 나갈 것을 다짐했다. 용지공소는 대지 504평에 건평 41평의 3층 적벽돌 건물(900여만 원 소요)이다. 당시 황인준(다니엘) 형제가 성모상을 봉헌했다. 공소가 신축된 후 공소미사에 100여 명이 참례하였으며 대축일에는 신풍성당에서 미사를 참례하고 있다. 55년 63명, 60년대 27명, 70년대 39명, 80년대 71명, 90년대 21명의 영세자 기록을 가지고 있다. 2001년 11월 공소 외벽 방수공사로 신축 당시 적벽돌 색은 아니었다.
현 공소회장 경지중(다마소) 형제와 배우자 김선옥(사비나) 자매는 결혼 당시 가진 것 하나 없이 농장일과 목장일 등에 열심히 일했다. 공소 신자들 또한 축사와 농원 일을 가리지 않았고 이들의 자녀들도 부모님의 성실함을 닮았다.
용지공소는 30가구 중 28명이 미사에 참석한다. 60대 다섯 명과 70대~80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고령은 98세의 루시아 자매이다.
현재 공소의 실존 자료가 부족하여 4대 공소회장이었던 정원섭(다두) 형제의 설명과 그가 지니고 있던 자료로 용지공소를 취재하였다. 어려운 환경에서 수백 년 전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아 실향민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보았다.
취재 : 이진주 마리안나(교구 기자단), 사진 : 최경호 요수아(교구 가톨릭사진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