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의 작은 교회 공소를 찾아서(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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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12-17 조회 2,019회본문
월성공소 입구 골목길에 들어서면 인자한 미소의 성모상이 먼저 반겨준다. 성모상 뒤엔 십자가가 후광처럼 성모님을 감싸고 있고 성모상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양재철 안토니오 신부의 어머니가 기증했다는 종탑이 우뚝 서서 공소건물을 지지하고 있다. 공소안에는 공소 건물과 세월을 같이 한 신앙의 유산들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60년 전 故김후상 신부가 즐겨 연주했다는 오르간, 공소제대, 십자가, 각종 성상, 특히 사순절이면 매일 신자들과 신앙의 시간을 함께해온 14처가 공소 내부를 신앙의 빛으로 감싸고 있다.
갓난아기 때 시름시름 앓다 곧 죽겠구나 했는데 비상 세례를 받고살아났다는 공소 기적 1호인 아기 황차규(바오로, 현 공소회장)는 45년 후 8대 공소회장이 되어 27년째 공소를 돌보고 있다. 당시 비신자였던 부모와 친척들은 세례로 살아난 아기를 보고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믿음은 아버지 故황희학(라볼) 형제를 2대 공소회장으로 이끌었다. 대를 이어 회장을 하는 것은 믿음의 고향인 공소의 큰 특징 중 하나일 것이다.
월성공소(황등성당 관할, 주임=김광석 신부, 익산시 하나로 15길 188-1)는 1937년 완주 상관에서 이주한 박철근(가스팔) 형제의 집에서 공소예절을 하면서 공소가 설립되었다. 박철근 형제의 형인 박일종(요셉) 형제가 초대회장을 맡아 1960년 공소건물이 완공되고 공소가 안정되기까지 기초를 닦았다. 44년 전 고산 되재공소에서 시집온 이순옥(수산나, 현 공소회장 배우자) 자매는 당시의 북적이던 공소 모습을 증언했다. “미사때 마다 공소 마룻바닥이 꽉 찼어요. 특히 주님 승천 대축일에는 공소가 온통 들썩거렸지요.” 주님 승천 대축일은 황등성당 관할 3개 공소(월성, 신등, 삼기공소)와 본당 신자들이 만나는 축제일이기도 했다. 4년에 한 번씩 장소를 돌아가며 전 신자가 한자리에 모여 야외 행사를 했다. 돼지 1마리 잡으면 모두가 푸짐하게 먹던 그때가 음식 맛만큼이나 신앙살이도 신나던 때였다. 김순옥(막달레나)자매는 41년 전 서울에서 시집와 공소가족이 됐다. “성탄전야 때는 공소 전 신자가 황등성당까지 걸어갔어요, 눈이 쌓여 푹푹 밟히는데도 아이들을 옆에 세우고 큰소리로 성가 부르며 걸어가면 어찌나 신나던지 춥지도 않았어요.”
공소는 나무판자로 마감된 공소외벽을 60년째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공소와 함께 지어진 뒷 채 초가집은 사람이 상주하지 않으면서 허물어져 신자들은 좀도리쌀을 모아 건물을 새로 지었다. 골이 자잘한 양철 함석이었던 지붕은 2004년 개량되었고 마룻바닥은 2013년 공소 전 신자가 땀을 흘려 콘크리트 바닥으로 교체하였다. 공소회장이 되면 시간 맞춰 종을 쳤다. 삼종기도와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 그리고 장례를 알리는 종소리는 구분됐다. 하루 세 번 빠르게 울리는 종소리에 공소신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삼종기도를 바쳤고, 느리게 간격을 두고 세 번 울리는 종소리에서는 앓고 계시던 어르신의 임종 소식을 들었다.
1979년엔 매괴의 모후 쁘레시디움(단장=김순옥)이 설립되었다. 취재 당일 2083차 주회를 위해 모인 단원 6명은 성경필사와 통독은 물론 황등성당 6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벌였던 60만 단 묵주기도 봉헌운동의 기도부대이기도 하다.
이순옥 자매는 기도와 함께 살아온 신앙의 시간들을 되짚었다. “평생 기도로 살아왔어요. 하루아침에 3갑씩 피우던 남편 바오로 형제의 담배와 술을 끓게 해 주고 그 어렵다는 심장 수술도 끄떡없이 견디게 해 준 것은 다 기도였어요.”
공소미사는 매월 첫째 주 금요일 저녁 7시에 봉헌된다. 공소 건물은 60년의 세월을 견디어내며 군데군데 나무 널빤지 외벽이 떨어져 빈자리가 생겼다. 어르신들이 병환으로 누워계신 빈자리와 젊은이들이 생업을 위해 빠져 나간 빈자리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기도로 채워온 공소신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지켜가는 공소의 힘을 보았다.
취재 | 오안라 안나(교구 기자단), 사진 | 원금식 대건안드레아(교구 가톨릭 사진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