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公所)] 46.전주교구 시기동본당 등천공소[가톨릭평화신문 202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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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12-07 조회 551회본문
기해·병인박해 순교자 후손들 모여 일군 뿌리 깊은 신앙 공동체
[공소(公所)] 46.전주교구 시기동본당 등천공소
전주교구 시기동본당 등천공소는 기해박해 순교자 조 안드레아와 병인박해 순교자 조화서 베드로와 조윤호 요셉 성인의 후손인 조 프란치스코 가족과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이주해 정착하면서 형성된 유서 깊은 신앙 공동체이다. 등천공소 전경.
전주교구 시기동본당 등천공소는 전북 정읍시 입암면 원등2길 26에 자리하고 있다. 입암면 등천리는 정읍시 남단의 원등, 신등, 군령을 포함한 마을로 입암산 아래에 있다. 입암(笠岩)은 우리말로 ‘갓바위’이다. 입암산 서쪽 정상에 갓바위가 있어 유래된 이름이다. 조선 왕조 때 이곳에서 사직제와 기우제를 지내 ‘제석암’ ‘제석봉’으로도 불린다.
등천리(登川里)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남이면 등천리, 신령리, 군령리, 백연리, 장재동과 서일면 수얼리, 연동리 일부 지역들을 병합해 으뜸 마을 이름을 따 등천리라 하고, 입암면에 편입됐다. 등천은 개천이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조선조 중엽에 형성된 ‘등내(登內)’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래서 등천공소를 등내공소라고도 부른다.
시기동본당 등천공소는 지금도 마을 주민 대부분이 교우일 만큼 교우촌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공소이다. 6ㆍ25전쟁 후 1957년에 새로 지어 봉헌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등천공소 내부.
박해 피해 깊은 산속에 형성된 신앙 공동체
입암산에는 정읍에서 한양과 전남 장성으로 넘어가는 1000년 넘은 고갯길이 있다. 바로 ‘갈재(葛岾)’다. 억세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어로는 ‘노령(蘆嶺)’으로 표기된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예고된 갈재는 고려 현종이 거란군을 피해 나주로 몽진할 때 거쳐 갔던 길이다. 또 전라도와 제주도의 새 부임지로 가던 관리들이나 유배지로 가던 유배자들이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갯길이다. 아울러 바람도 구름도 쉬어 넘던 이 고갯길은 조선 왕조 시대 박해를 피해 전라도의 깊은 산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로 숨어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넘었던 천주교인들의 피난길이기도 했다.
등천공소 역시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도에서 이곳으로 피신해 온 순교자들의 가족들과 후손, 교우들에 의해 형성된 유서 깊은 신앙 공동체다. 등천공소는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조 안드레아,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성 조화서(베드로)와 조윤호(요셉)의 후손인 조 프란치스코가 충남 당진에서 순창 오룡촌 교우촌을 거쳐 정읍 입암면 산부리 골짜기로 숨어들면서 시작됐다.
조화서 성인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수원에서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한 뒤 한때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활동했다. 그러다 1866년 12월 5일 아들 조윤호와 이명서(베드로), 정원지(베드로) 등과 함께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5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조윤호 성인은 조화서의 아들이다. 그는 1864년 아버지를 따라 전주 성지동 교우촌으로 이사한 후 1866년 12월 아버지와 함께 체포됐다. 조윤호 성인은 아버지가 순교한 지 열흘 지난 12월 23일 전주 숲정이에서 곤장 16대를 맞은 뒤 1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등천공소의 첫인상은 참 단아하고 깔끔한 느낌을 준다. 공소를 아끼고 사랑하는 교우들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공소 교우들이 가꾼 단아한 성모상.
1895년 “등천에 19명의 교우가 살고 있다”
조 프란치스코는 이곳에서 다섯 자녀와 움막을 짓고 살다가 점차 교우들이 모여들면서 등천(등내)으로 내려와 교우촌을 일궜다. 1895년 이곳에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사목 방문한 수류본당 주임 라크루 신부는 “등천에 19명의 교우가 살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시기동본당은 등천공소 설립 연도를 1895년으로 정했다.
등천공소 교우들은 궁핍했다. 그들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거친 땅을 경작해 구황작물인 조와 수수, 옥수수, 메밀, 콩, 기장을 심었다. 하지만 조정이 감자 농사를 금해 감자를 심을 수 없었다. 감자 판매 수익이 높아 농부들이 다른 곡물을 재배하지 않고 감자 농사만 지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변히 먹을 것이 없던 산골 교우들은 사제들이 사목 방문하는 해이면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몰래 소량의 감자를 재배했다. 등천의 교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등천의 교우들은 입암산에서 약초를 캐 생계를 유지했다.
1903년 6월 정읍본당이 신설되고 초대 주임으로 김승연(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했다. 본당이 설정되자 신성공소와 교우들이 가장 많던 등천공소가 서로 본당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을 했다. 신성공소는 임정수ㆍ배사진 등이, 등천공소는 조명서ㆍ주명진 등이 주축이 돼 본당 유치에 나섰다. 하지만 정읍 시내에서 가까운 신성공소가 본당으로 낙점됐다.
전주교구 시기동본당 등천공소 종탑.
6ㆍ25 전쟁 때 빨치산에 의해 공소 소실
경향잡지 1920년 7월호에 ‘등천 천주당(정읍군 입암면 등천리) 설치 허가’라는 기사가 나온다. 아마도 이때 등천공소 건물을 짓기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등천공소 건물이 언제 완공됐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1924년 11월 3일 초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가 이곳을 사목 방문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4일 드망즈 주교는 4칸 한옥의 등천공소를 축복하고,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했다. 그리고 요셉 성인을 등천공소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부는 가톨릭교회를 심하게 통제했다. 사제가 공소를 방문할 때도 반드시 경찰에 등록된 공소에만 갈 수 있었고, 일본 형사가 동행해야만 허용됐다. 정읍에도 등천ㆍ신성ㆍ대숲골공소만 사제가 방문할 수 있었다. 이들 공소 교우들은 일본 형사의 감시 아래 미사를 봉헌했고, 교리교육도 암기식 문답 교리만 가르칠 수 있었다.
등천공소는 6ㆍ25 전쟁 때 빨치산에 의해 소실됐다. 1954년 등천공소 교우들은 입암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임시 공소를 지었고, 1957년 제10대 정읍본당 주임 김영일 신부가 대지 500평에 18평 규모의 공소를 신축 봉헌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등천공소는 지금도 마을 주민 대부분이 교우일 정도로 교우촌을 유지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