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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公所)] 39. 전주교구 고산본당 되재공소[가톨릭평화신문 202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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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10-20 조회 60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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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한국 교회 최초로 봉헌된 한옥 성당

[공소(公所)] 39. 전주교구 고산본당 되재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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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북부 지역 복음화 산실 역할을 했던 되재공소는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지은 한옥 성당이다. 2009년에 복원한 되재공소.



전라북도 북부 지역 복음화 산실 역할

전주교구 고산본당 되재공소는 전북 완주군 화산면 승치로 477에 자리하고 있다. 승치(升峙)의 우리말이 ‘되재’이다. 이 지역 고개가 매우 높아 ‘되고’, 지형이 마치 ‘됫박’을 엎어 놓은 것 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되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미서리, 미남리, 백암리 일부를 합해 ‘승치리’라 해서 전주군 운선면에 편입됐다가 1935년에 완주군 화산면에 속하게 됐다. 되재는 동으로 미륵산, 서로 예봉산, 남으로 성북리, 북으로 매봉산이 둘러싸고 있는 깊은 산간지대다.

고산은 전주와 진산과 함께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가톨릭이 전래된 곳이다. 한국 가톨릭교회 창설기에 전주의 복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진산의 복자 윤지충(바오로), 고산의 복자 윤지헌(프란치스코)이 전라도 지역에 복음을 전파했다. 1795년 4월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과 유관검의 안내로 고산 저구리에 여러 날 머물면서 성사를 집전했다. 이때 윤지헌과 복자 김강이(시몬), 김창귀(타대오)가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윤지충의 동생인 윤지헌은 황심(토마스)과 유항검을 중심으로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선교사들이 서양의 큰 배를 타고 조선에 오길 청하는 ‘대박청래(大舶請來))운동’을 적극 추진하고, 황심(토마스)을 조선 밀사로 북경 교구에 보내는 일에도 참여했다. 그는 이 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능지처참형을 받고 전주에서 순교했다. 윤지헌의 유해는 지난 2021년 전주 초남이성지 바우배기에서 발굴됐다. 이처럼 고산 땅은 한국 교회 창립 초기부터 전라도 지역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였다.

한국인 여섯 번째 사제이며 전라도 출신 첫 사제인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신부도 고산 출신이다. 이 신부는 1897년 12월 18일 명동대성당에서 한기근(바오로)ㆍ김성학(알렉시오) 신부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목포 산정동본당 보좌, 무안 우적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다 결핵으로 1900년 12월 38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했다.

고산은 지역적으로 북쪽의 다른 도에서 전라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박해 시기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피신한 교우들은 고산을 거쳐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188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에도 선교사들은 고산을 거쳐 전라도 지역으로 복음을 전해야만 했다. 이런 이유로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891년 10월 고산 지역 본당을 설정하고 초대 주임으로 우도 신부를 임명했다. 이후 1893년 4월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비에모 신부는 고산 지역 공소들의 중심지인 되재에 성당 부지를 정하고 되재본당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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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모습 그대로 복원한 되재공소 한옥성당은 남녀 교우를 구분하는 칸막이가 회중석 가운데에 설치돼 있다.

한강 이남에서는 첫 번째로 지어진 성당

비에모 신부는 1894년 1월 한옥 성당을 착공했다. 시골인 데다 한국인의 정서와 생활 문화에 이질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건축 목재는 완주군 운주면 가천리 화암사에서 샀다. 그리고 충청도 은진 쌍계사를 매입, 절을 뜯어 옮겨다가 성당을 짓는 데 사용했다. 공사비는 비에모 신부가 비축한 돈을 쓰고, 부족분은 프랑스 고향에서 지원받기로 했다.

비에모 신부는 토착민들에게 먼저 친근하게 다가갔고, 지방 관리들의 폭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변호인 역할을 성실히 했다. 이에 선교사를 경계하던 주민들이 먼저 그를 찾았고, 여러 마을에서 비에모 신부 감사비를 세우기까지 했다. 그 결과 “현재 고산에서 예외적인 개종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교리문답 두 짐이 눈 깜짝할 사이에 팔려나갔다”(「뮈텔 주교 일기」 1894년 1월 25일 자)고 할 만큼 곳곳에서 세례를 받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이들이 늘었다.

되재성당 신축 공사가 한창일 때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동학군들은 몇 차례 되재성당을 파괴하려 시도했으나 기적같이 성당을 보존할 수 있었다. 되재성당은 1896년 11월 1일 뮈텔 주교 주례로 봉헌식을 했다. 되재성당은 한국에서는 서울 중림동약현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건축된 성당, 한강 이남에서는 첫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 됐다. 아울러 되재성당은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봉헌한 한옥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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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한 되재공소 옛 제대.

1944년 본당 폐쇄되고 전쟁 중 성당 소실

드망즈 주교는 1931년 전라도를 한국인 자치 교구로 설정하기 위해 ‘전라도 감목대리구’를 설정했다. 그리고 한국인 신부만 남기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모두 전라도에서 철수시켰다. 이로 인해 전라도 지역 성직자 부족 현상이 심화됐다. 또 수청리ㆍ나바위ㆍ논산본당이 설립되면서 산속에 있던 되재본당은 점차 전교의 중심에서 벗어난 변두리 본당으로 전락했다. 설상가상 1942년 말 되재본당 주임 임인교 신부가 만주 간도로 사목을 떠나면서 성직자 공석 본당이 됐다. 이에 제3대 대구대목구장 하야사까 구베에 주교는 1944년 10월 되재본당을 폐쇄하고 수청리본당 관할 공소로 귀속시켰다.

되재성당은 6ㆍ25전쟁 때 빨치산의 거점이 될 것을 우려한 국군이 불을 질러 전소됐다. 휴전 후 되재의 교우들은 1954년 슬레이트 건물을 지어 공소로 사용해 왔다. 이후 전라북도와 완주군은 10억 9000만 원을 들여 가로 3칸, 세로 8칸에 바닥 면적 143㎡(42.3평)의 옛 되재공소 한옥성당을 복원해 2009년 10월 24일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했다. 되재공소는 2007년 5월 15일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됐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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