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성월] 한국 첫 순교 터에 세워진 전동성당, 보수 마치고 2년 만에 공개[가톨릭평화신문 2022-09-18]
페이지 정보
작성일2022-09-16 조회 905회본문
[순교자 성월] 한국 첫 순교 터에 세워진 전동성당, 보수 마치고 2년 만에 공개
전주 전동성당, 복원 공사 마무리
2022.09.18 발행 [1678호]
▲ 최근 대대적 보수ㆍ복원 공사를 마친 전동성당(오른쪽)과 사제관(성당 왼쪽). 그 뒤로 2010년에 지은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순교자 기념관, 성심유치원, 수녀원 등이 보인다. 이승선 기자 |
전주교구 전동성당(주임 김성봉 신부)이 최근 대대적 보수ㆍ복원 공사를 마치고 제모습을 드러냈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1759~1791)과 권상연(야고보, 1751~1791), 두 복자의 순교 터에 세워진 성지 성당다운 옛 면모를 되찾았다. 1993년 8월 성당 벽체와 창호 보수공사를 한 지 29년 만에 전동성당은 또다시 보수ㆍ복원 공사를 마무리하게 됐다. 완공된 지 올해로 108주년을 맞은 전동성당의 보수ㆍ복원은 지난 7월 말로 마무리했지만, 주차장 옆 아스팔트 제거와 재포장, 공사 중 철거됐던 장애인 경사로 재설치 등 부대 공사가 최근에야 끝을 맺어 순례자를 맞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게 됐다. 이에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전동성당 일대에서 피를 흘린 순교자들의 수난과 순교를 기억하는 순교성지 전동성당을 찾았다.
2년 3개월 만에 성당 외부 비계(飛階) 구조물이 해체되고 가림막이 철거되자 탄성이 쏟아졌다. 풍화되고 부식된 데다 일부는 균열되고 손상됐던 고벽돌을 교체하면서 전동성당의 제모습이 오롯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간 외벽 공사로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며 불편을 감수해야 했던 전동본당의 신자들은 감격에 젖었다. 이뿐일까? 1791년 신해박해로 피를 흘린 첫 순교자 윤지충ㆍ권상연 복자,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ㆍ윤지헌(프란치스코, 1764∼1801) 복자, 유관검(1768∼1801), 김유산(토마스, 1760∼1801), 이우집(1761∼1801) 등 초기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순교 신앙, 그 숨결을 호흡하고 느끼고 체감하고 싶어 성지를 찾았던 순례자들, 한옥마을에 들렀다가 아름다운 성당에 반했던 젊은이들이나 관광객들도 제모습을 찾은 전동성당을 보고 기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 공사를 통해 전동성당 외벽에서 교체된 적색과 회색 고벽돌만 3000장. 성당 정면 외벽 파사드(Faade)의 벽돌이 주로 교체됐고, 성당 측면부와 처마 물받이 아래ㆍ위 벽돌도 상당수 교체했다. 당초 문화재청과 전주시 전통문화유산과에선 8500장 정도 교체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당장 교체가 시급하지 않은 벽돌은 그대로 뒀다. 그래서 일부 이끼가 끼거나 곳곳에 깨진 벽돌도 남았지만, 아직은 그대로 둬도 괜찮다는 문화재위원들의 판단에 따라 교체를 최소화했다. 108년 전, 공사를 맡은 중국인 기술자 100여 명이 공사현장에서 직접 구워 쌓아올린 벽돌 성당의 원형을 유지하고 살리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성당 1, 2층 처마 물받이 홈통과 물이 모여드는 모임통도 철거하고, 규격이 커진 물받이 홈통과 모임통을 재설치했다. 1914년 신축 당시 치명자산(승암산)에서 가져온 목재로 만들었던 창호(창틀ㆍ창짝)에 유성 착색제(oil stain)와 유성 페인트를 칠하고 새단장했다. 원래는 성당 남서쪽 제의실 목재 창호 3개도 창틀을 교체할 계획이었지만, 아직은 쓸만하다는 판단에 따라 원형을 보존했다. 또한, 성당 외벽면 전체에는 발수제를 뿌렸고, 성당 정면 출입구 상단 내려앉은 천장도 반자틀을 새로 설치하고 합판을 붙였다. 성당 정면 입구 미장한 부분이나 종탑과 첨탑에 미장한 곳도 해체한 뒤 회반죽으로 다시 미장작업을 했다. 전동성당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88호여서 이번 문화재 보수ㆍ복원 공사비 10억 원은 전액 정부 예산으로 충당했다.
이처럼 전동성당의 대대적 보수ㆍ복원공사를 하게 된 건 2018년 전주시와 (유)세종건설기술에서 진행한 안전진단에서 성당 벽체와 목재, 마감재, 지붕 동판 등에서 풍화나 부식 등의 현상이 대거 발견됐기 때문이다.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성당 벽체에서 풍화로 균열된 벽돌이 떨어져 나가고 벽돌 사이 줄눈이 벗겨진 곳이 여러 곳에서 발견됐으며, 지붕 목재 트러스에서 맞물리는 부분이 벌어지고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조사됐다. 마감재 또한 회반죽 마감 부분에 균열이 발생했고, 처마 홈통이 파손된 곳이 보였으며, 지붕 동판이 부식되는 등 곳곳에서 손상이 발견됐다. 이에 풍화나 부식 등이 생긴 성당 벽체 벽돌 등의 교체와 기타 자재 보수, 보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와 공사가 이뤄졌다.
김평기(토마스, 69) 전동본당 총회장은 “풍화나 부식이 심한 벽돌은 빼내 새로운 벽돌로 교체하고, 처마 물받이나 목재 창호, 미장, 도장 작업을 새로 하면서 성당이 제모습을 되찾아 너무 기쁘다”면서 “하느님께서 저희 본당공동체에 정말 큰 은혜를 주셨다”고 말하며 감격스러워했다.
▲ 전동성당 남서쪽 제의실 목재 창호 3개도 창틀을 교체할 계획이었지만, 아직은 쓸만하다는 판단에 따라 원형을 보존하고 대신에 유성 착색제(oil stain)와 유성 페인트를 칠했다. |
순교성지 전동성당은
1791년 12월 8일, 진산사건으로 촉발된 신해박해로 윤지충ㆍ권상연 복자가 전주감영으로 끌려와 풍남문 밖에서 참수된다.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운, 이른바 ‘폐제분주’(廢祭焚主)의 죄목으로 순교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로부터 두 복자 순교 100주년이 되던 해인 1891년, 한국 교회 첫 순교자의 순교 터에 전동성당이 세워졌다. 물론 전동본당 설정은 이에 앞서 1889년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일명 대승리)에 파리 외방 전교회 보두네(Francois Xavier Baudounet) 신부가 부임하면서 시작됐지만, 보두네 신부가 전주 전동으로 본당을 옮기면서 ‘전동성당 시대’가 막이 오른다. 이때의 전동성당은 물론 지금의 성당이 아니다. 당시는 전주성 남문, 곧 풍남문 남쪽에 자리한 영저리(營邸吏, 조선 시대 때 감영에서 군현과의 연락 업무를 맡았던 이속)의 집을 사들여 그곳에서 사목이 이뤄졌다.
그 터전에 성당 신축이 시작된 건 1908년이다. 설계자는 빅토르 루이스 프와넬(Victor Louis Poisnel) 신부.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내부 공사를 마무리했던 그의 설계로 1914년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동성당이 완공됐다. 공사에 들어간 지 6년 만에 성당 외부공사는 마무리됐지만, 재정난으로 성당 내부공사가 끝나기까지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보두네 신부가 성당 완공을 보지 못하고 1915년 선종하자 2대 주임 라크루(Marcel Lacrouts) 신부 주도로 성전 내부 공사가 계속 진행됐고, 1931년에야 성전 봉헌식을 거행하기에 이른다. 특기할 것은 전동성당 성전의 주춧돌이 1909년에서 1911년 사이에 훼손되고 철거된 전주성 성벽돌이 사용됐다는 점이다. 보두네 신부는 당시 일제가 신작로를 개설하면서 전주성 서벽을 시작으로 동ㆍ북ㆍ서문, 동벽을 차례로 허물자 버려지던 돌을 사들여 성전 주춧돌로 썼는데, 그 이유는 일부 성돌이 첫 순교자인 윤지충ㆍ권상연 복자는 물론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ㆍ윤지헌(프란치스코) 복자, 유관검, 김유산(토마스), 이우집 등 효수된 순교자들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성벽에 스며들었을 것으로 추정됐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지어진 전동성당은 호남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로 교회사적 가치뿐 아니라 문화예술적으로, 건축사적으로도 탁월한 조형미를 인정받으며 신앙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전동본당 주임 김성봉 신부는 “순교성지이다 보니 본당 신자들뿐 아니라, 순례자들, 한옥마을을 보고 나서 오시는 분들까지 모든 분께 개방되는데, 단순히 사진만 찍고서 돌아가지 말고, 성당 안에 머무르면서 윤지충ㆍ권상연 복자 등 여러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기도도 하고 신앙도 재충전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