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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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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일(마르 9,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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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9-13 17:34 조회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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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와 어린이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9,31).

 

오늘은 연중 제25주일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신다. 그러니까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가 되는 셈이다.

복음의 배경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수난에 대한 말씀을 처음 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크게 꾸짖으셨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시어 신비적인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이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신비스러운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아들이신 당신의 신적인 모습을 체험하게 하셨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신 뒤에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낫게 하시면서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셨다. 이러한 체험과 권능을 통해서 앞으로 있을 당신의 수난이 곧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오시는 길에 갈릴래아 지방을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때에 다시 당신의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예수의 일행이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 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일러 주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마르 9,30-32).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가시는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것을 보면 당신 수난에 대한 착잡한 심정에 제자들하고만 시간을 갖고자 하신 것 같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당신 수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하신다. 죽음에 대한 너무 기막힌 말씀을 두 번씩이나 하시는 바람에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을 뿐더러 묻기조차 두려워했다. 제자들은 당황하고 넋을 잃었다. 그만큼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분께서 왜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으셔야 하는지,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무섭고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수난에 대한 말씀이 있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신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제자들끼리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이 다툰 것을 아시고 집에 들어가신 뒤에 무슨 일로 다투었는지 물으신다.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그들은 가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집에 들어 가시자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마르 9,33-34).

복음에서는 그때 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는 문제로 다투었는지 그 이유는 전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죽음에 대해서 두 번씩이나 말씀을 하시자 후계자에 대한 걱정이 되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서로간에 제일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세력다툼에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사실 제자들은 아직 인간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수난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싸운다는 것은 인간사에서 자주 있는 일이며, 또한 고통스러운 것이다. 인간이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에 대해서 오늘 제2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는 곳에는 분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야고 3,16).

야고보서는 시기심과 이기심이 있는 곳에 서로 분란을 일으키고 싸우는 더러운 행실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싸움은 이처럼 인간적인 탐욕에서 생기는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2-3).

탐욕과 욕정은 모든 분쟁과 싸움의 원인이 된다. 분쟁과 싸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오직 마음을 하느님께 두고 이기심과 시기심을 버려야 한다. 제자들의 다툼을 보면 아직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하고 인간적인 삶에서 욕심을 부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기심과 자만심을 버리고 온전히 하느님을 향한 순종과 겸손을 가르치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아 열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시고 말씀하신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순종으로 남을 섬길 때, 남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진정한 으뜸이 되는 것임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앞에 세우시고 그를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 들이면 곧 나를 받아 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 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성서에서 어린이는 누구인가?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어진 당신의 비밀을 어린이에게 제시하고자 하신다. 어린이는 곧 예수님 자신이고 하느님 아버지의 표상이기도 하다. 또한 어린이가 상징하는 의미는 항상 어머니 품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사랑과 신뢰, 순종과 겸손을 나타낸다. 따라서 어린이는 맑고 깨끗하고 순수함을 나타내면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표본이며, 또한 가장 좋은 생활자세의 가치기준이 된다. 진실로 위대하게 되는 비결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데에 있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참된 겸손이며, 이것 없이는 아무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예루살렘이 어머니로 의인화되었듯이, 어린이는 거룩한 도시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표현되어 하느님 백성임을 나타낸다. 어린이는 하느님의 본성과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이를 받아들임은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당신을 받아들임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느님 본성의 상징인 어린이가 될 것을 가르치신다. 어린이가 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수난을 깊이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들도 그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면서 서로 누가 제일 높으냐고 다투었던 제자들에게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어린이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하느님 나라 주인의 상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극히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