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시면,

많은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메뉴 더보기

주일복음해설

SNS 공유하기

연중 제14주일(마르 6,1-6)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7-01 09:14 조회215회 댓글0건

본문

우리 가운데서 예언자를 보내주신다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마르 6,4).

 

오늘은 연중 제14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에 가신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에 가셨다는 기록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단 한 번 나오는 일이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에 가셨는지는 언급이 없다. 다만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다가 고향 사람들로부터 예기치 못한 냉대와 박대를 받으셨다는 것만을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의 고향은 나자렛이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오신 뒤에 전도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어린시절과 유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내셨다. 나자렛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 성인이 예전부터 살았던 고향이며 친척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고대 나자렛의 위치는 현재의 나자렛이 있는 곳으로 보고 있다. 궁금한 것은 구약이나 탈무드, 미드라쉬의 글에 나자렛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나자렛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마을이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요한 복음서에도 나타나엘이 이렇게 말한다.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나타나엘은 갈릴래아 가나 출신으로 필립보가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이다. 이는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듯하며, 바르톨로메오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이렇듯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나올 가능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나자렛은 이즈르엘 평야의 북쪽 계곡(분지)에 있는데, 이 계곡은 남쪽으로만 통할 수 있으며, 동쪽과 남동쪽을 향하고 있는 언덕 위에 이 마을이 있다. 이 곳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남서쪽으로 약 24km, 지중해로부터 약 32km 떨어져 있으며, 해발 433m의 위치에 있다. 유적들로 보아서 예전의 이 마을은 언덕 위에까지 뻗어 있었던 듯하며, 예수님 당시에는 작고 고립된 마을이었다. 신약성서에서 나자렛은 천사 가브리엘이 아기 탄생을 예고할 때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으로서 처음 나온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구 조사령이 내려지자 베들레헴을 향해 떠났고 아기 예수가 태어난 뒤 다시 나자렛으로 돌아왔다. 소년시절의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에서 줄곧 살았으며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처음으로 나자렛을 떠나시는데, 이로써 고향을 완전히 떠나신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왜 나자렛을 떠나 가파르나움에서 사셨는지에 대해서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다만 가파르나움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목이며 번창하는 도시였기 때문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그 후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들리셨다는 말은 단 한 번 언급되어 있는데, 오늘 복음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난주 복음에 나오는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고 나서 제자들과 함께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으로 가셨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가시어 가르치시는데 많은 사람들이 놀란다. 사람들이 놀라며 하는 말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 것뿐만 아니라,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기적도 행하신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마르 6,2) 하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신적인 권능을 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예수를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마르 6,3).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이상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자기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생각하려고 한다.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신 일을 보았으면서도 인간적인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계시를 보여주시며 당신의 말씀을 전하시는 데 있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떤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신다. 성서의 역사를 보면 당신의 일꾼들을 부르시는데 모르는 사람을 불러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부르시어 선택하신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어 보낸 사람은 우리의 이웃인, 가난한 사람이나 보잘것없는 초라한 사람일 수도 있고, 병자일 수도 있고, 어쩌다 찾아오는 친구일 수도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 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실 때 일반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택하신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한다.

"본래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듣지도 않겠지만 듣든 안 듣든 내 말을 전하는 자가 저희 가운데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에제 2,5)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이 같은 동족이며, 잘 안다는 사실 때문에 동족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외면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자렛 사람들 역시 똑같았다.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은 반항하는 족속들처럼 놀라고 경탄해 하면서도 같은 고향 사람이고 같이 살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마르 6,4).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을 보시고 과거 예언자들이 고향 사람들과 친척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척받았던 사실을 상기시켜 주신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시어 병자 몇 사람에게만 손을 얹어 고쳐주셨을 뿐 다른 기적은 행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의 은총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 이 복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이웃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이웃을 넓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어떤 개인이나 친구, 가까운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함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그들의 기쁨과 희망을 앗아가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까운 이웃 안에 계신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계시를 드러내고 계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이웃의 말을 잘 들어주고, 그의 말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해야 한다.

 

"내 말을 전하는 자가 너희 가운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