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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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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3주일(마르 5,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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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6-24 08:46 조회2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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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예수님


"예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라는 뜻이다"(마르 5,41).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을 치유하시는 기적을 보여주시는데 하나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이고, 또 하나는 '살아난 야이로의 딸'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두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절망적인 삶과 죽음에 깊이 관여하시어 삶의 희망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인간의 삶을 뒤흔들어 놓는 질병과 죽음을 지배하는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신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특이한 것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는 과정에서 12년 동안 하혈증으로 고생하는 여자를 고쳐주시는 이야기를 사이에 끼워 넣어 전개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두 이야기가 서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지만 서로 맞지 않을 뿐더러, 믿음을 권하는 것과 열둘이라는 숫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같은 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회당장 야이로의 딸 이야기도 전반부와 후반부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와 혼동해서 전개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먼저 회당장 야이로의 딸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와 혼동되었다는 것부터 알아보자. 이 이야기는 공관 복음서인 마태오 복음(9,18-26)과 루가 복음(8,40-56)에도 나오고 있는데 서로 일관성 있게 똑같지 않다. 이 세 복음서들 중에 루가 복음서만이 회당장의 이름을 정확하게 쓰고 있으며, 또한 이야기의 전개도 비교적 잘 되어 있다. 반면에 마태오 복음은 설명이 아주 간단하고, 야이로라는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복음인 마르코 복음은 더욱 복잡하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 이야기에 하혈증으로 고생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끼워 넣어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고 있는데, 후반부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와 혼돈해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마르코 복음서만이 후반부에 예수님께서 소녀에게 '탈리다 쿰(소녀야, 이서 일어나거라)'이라는 아람어를 쓰고 있는 점이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마르코 복음사가가 혼동해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 이야기와 섞어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도르가'라고 하는 여인을 살려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방에서 모두 내보낸 뒤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나서 시체 쪽으로 돌아 서며 '다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는 눈을 뜨고 베드로를 바라보며 일어나 앉았다"(사도 9,40).

이 여인의 이름은 그리스 말로 '도르가', 즉 사슴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는 이 여인을 살리면서 '다비타, 일어나시오'라고 한다. '다비타'는 아람어이다. 따라서 이때에 베드로가 사용한 '다비타'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탈리다 쿰'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탈리다 쿰'이란 말 역시 같은 아람어이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나 루가 복음사가는 아람어를 쓰고 있지 않은데 마르코 복음사가만이 특별히 아람어를 쓰고 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사가가 회당장 야이로의 딸 이야기를 하면서 죽은 다비타의 이야기를 착각해서 중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원래가 한 권으로 된 책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설에 상당한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치유는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메시아로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비교적 비중이 큰 기적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를 살리시는 기적으로는 요한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의 사건이 있다.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사건은 이스라엘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예수님께서 수난의 길을 걸으시는 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크게 자극한 사건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오늘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킨 기적 역시 예수님께서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당신의 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신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오늘 이야기의 배경을 보면 이렇다. 예수님께서 바다 가운데서 풍랑을 잠재우시고(지난주 복음) 호수 건너편에 있는 게라사 지방으로 가셨는데,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더러운 악령들린 사람 하나가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악령을 2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에게 들어가게 하시고, 그 돼지떼를 바다에 쳐 넣어 죽이시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려 호숫가에 계셨을 때에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 앞에 엎드려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회당장의 청을 들어주시는데 그 사건이 바로 오늘 복음이다.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 주십시오"(마르 5,23).

예수님께서는 그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를 따라 나서신다. 예수님께서 그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신 것은 죽은 야이로의 딸을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려 하신 것이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밀어 대며 따라갔는데, 그 군중들 속에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예수님 몰래 그분의 옷에 손을 댄다. 복음서는 그 여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어 따라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마르 5,26-29).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서서 군중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신다.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 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한다. 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린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마르 5,34).

그 여자의 믿음은 대단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시며 그의 병을 깨끗이 고쳐주신다. 그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12년 동안 자기를 괴롭혔던 질병에서 깨끗이 치유되어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맛본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잠시 그 여자를 통하여 믿음의 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를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말씀을 다 하시기도 전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저 선생님께 더 폐를 끼쳐 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시고 회당장에게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신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사람들이 울며불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집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마르 5,39).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실 때에도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요한 11,11)라고 말씀하셨는데, 죽은 회당장의 딸에게도 잠을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잠을 자고 있다고 표현하신 것은 죽은 사람이 잠을 자듯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또한 생명과 죽음을 모두 다 지배하고 계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코웃음만 쳤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다음에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시고 아이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 두 살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 마지 않았다"(마르 5,40-42).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다시 살아난다.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 아이는 생명을 얻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하느님의 권위가 있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그 소녀가 분명하게 살아났음을 증명시키신다. 이 사건은 훗날 생명의 원천인 당신의 부활을 암시하는 것이며, 당신의 부활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예표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비록 사도행전의 베드로 이야기와 혼동하였지만 오늘의 이야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이심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생명을 지니신 생명 그 자체이시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과 함께 그 집에 간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은 이를 목격함으로써 메시아이신 그분에 대한 산 증인이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참 생명을 지니신 분이심을 믿고, 증인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그분을 증언해야 한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불멸한 것으로 만드셨고 당신의 본성을 본따서 인간을 만드셨다.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 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니 악마에게 편드는 자들이 죽음을 맛볼 것이다"(지혜 2,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