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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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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일(마르 4,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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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6-10 08:43 조회214회 댓글0건

본문

하느님 나라에 대한 자라나는 씨의 비유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마르 4,30-31).

 

오늘은 연중 제11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자라나는 씨의 비유'에 대한 말씀이다.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신 후에 별도로 하신 비유이다. 복음의 배경을 보면 지난주 복음인 '베엘제불과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나서, 다시 호숫가에 가시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오늘의 비유는 성장되어 가는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즉 하느님 나라는 자라나는 씨와 같이 성장되어 나가는 나라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마르 4,26-2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성장되어 가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잘 알아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씨뿌리기와 성장'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신다. '씨뿌리기'는 우리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비유이며, 특히 농경 사회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비유가 없다.

농업은 성서와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티나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중석기시대(B.C. 8000년-B.C.7000년경)부터 이스라엘에서 농사를 지은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B.C. 7000년경에는 진보된 농경문화가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팔레스티나에서 가축을 기른 것은 B.C. 5000년대 처음으로 도기가 나타날 즈음으로 전해지며, B.C. 4000년대에 이르러 현대의 품종과 비슷한 양과 염소를 길렀고, 고기보다는 털을 얻기 위해서 양 목축업이 촉진되었다고 전해진다. 팔레스티나 주민들은 공업이나 상업으로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서는 땅을 개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팔레스티나에서는 어떤 농작물도 쉽게 자랄 수 없었다. 돌들이 많은 땅이었으며, 기후 변화가 심하여 어떤 때는 몇 달 동안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그러한 곳이었다. 그래서 창세기에 나오는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 먹지 말라고 내가 일찌기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창세 3,17-18)는 말씀은 수세기 동안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팔레스티나의 농업은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정해주신 최고의 생활수단으로 여겨졌고, 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하느님의 돌보심 아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농부는 야훼께서 좋은 농사기술을 가르쳐주시어 배웠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으로 자연의 힘을 조절하셔서 최대의 결실을 맺도록 해주신다고 생각했다. 농업에 관해 표현한 구절은 성서 전반에 걸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회복된 영광스러운 미래를 농업적인 언어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나라인 포도밭을 서정적으로 노래하였다(이사 5,1-7). 마찬가지로 시인들과 현인들도 일상적인 농사용어를 사용해서 그들이 표현하려고 하는 생의 의미를 나타내는 데 주력했으며,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에제키엘도 하느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주 야훼가 말한다. 나도 그 송백 끝에 돋은 순을 따리라. 그 연한 가지에 돋은 햇순을 따서 높고 우뚝한 산 위에 몸소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것을 심으면 햇가지가 나서 열매를 맺는 훌륭한 송백이 되고 온갖 새들이 거기에 깃들이며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일 것이다"(에제 17,22-23).

송백나무는 소나무와 잣나무이다. 하느님께서는 송백나무의 햇순을 따서, 그것을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심어 열매를 맺는 훌륭한 송백나무가 되어 새들과 온갖 날짐승들이 깃들이게 하리라 하시면서 메시아 시대에 이루실 위대하고 풍성한 하느님의 나라를 암시하셨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이루실 하느님의 나라를 씨뿌리는 자의 비유나 포도원 일꾼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마태 24,32)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어떤 나무든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루가 6,43-44) 등을 말씀하시면서 농업에 대한 비유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치셨다. 이처럼 성서에서 씨, 포도나무, 나무, 열매 등과 같은 말들은 모두 하느님에 관한 진리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표현하고자 할 때 은유로서 적절하게 사용되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자라나는 씨에 대한 비유 역시 하느님 나라의 성장에 대한 말씀이다.

성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루가 8,11)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씨'란 단어에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더 부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씨에 대한 새로운 영적인 진리를 보여주심으로써 씨의 의미를, 씨의 개념에 영적인 씨의 개념을 결합시키신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져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영적인 씨와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씨뿌리기는 하느님의 자녀들로 태어나는 것이며, 또한 싹이 트고 자라서 풍성해지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들로 구성되는 풍요로운 하느님의 나라가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라고 하시면서 종말론적인 심판과 종말론적 구원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라나는 씨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나서 좀더 구체적으로 '겨자씨'에 대한 비유를 들어 설명해주신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마르 4,30-32).

겨자는 키가 큰 1년생 식물로 씨는 몹시 작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하느님 나라의 성장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뿌려져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 성장되어 가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비유로써 말씀을 전하셨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마르 4,33-3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씀하시면서 군중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사실 오늘 복음 앞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배를 대시고 그 안에 앉으신 다음 많은 군중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또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도 설명해주셨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다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주셨다고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처음부터 따로 철저하게 교육시키셨음을 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해야 할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든지 떠나서 주님 곁에 가 있든지 오직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만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2고린 5,9-10).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 우리가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잘한 일에 상을 받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일과 성장되어 가는 하느님의 나라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