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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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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대축일(요한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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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5-14 17:24 조회253회 댓글0건

본문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요한 20,19).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이다.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이제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말씀이신 예수님의 역사는 끝나고, 성령으로서의 하느님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이 되는 날,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내려오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날을 기념하는 날, 해방과 자유와 생명을 마음에 간직하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신 것이다. '나해'인 오늘은 특히 성령의 역사하심을 살펴보자.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영'이시다. 구약성서에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영'으로 나타나 활동하셨으며, 성령이신 '하느님의 영'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분리될 수 없으시며 고유한 위격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달리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윤곽을 그려 낼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께서는 인간의 모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얼굴이나 이름이 없으시다. 성서에 보면 그분의 이름은 보통 바람이나 호흡이라는 자연적 현상을 가리키는 명사로 응용되어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영'을 손으로 붙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고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가 없으며, 그분의 작용은 항상 내부로부터 시작되어 내면의 세계에서만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약속을 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 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은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7).

'하느님의 영'이라고 해서 아버지나 아들보다 더 신비하거나 덜 신비한 존재는 아니다. 곧 아버지와 아들과 똑같은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다'라는 말씀으로 성령이 곧 내적 신비의 하느님이심을 암시하신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영'을 위격으로 나타내지 않고 인간들을 변화케 하여 놀라운 예외적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신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즉 '하느님의 영'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을 당신의 소명에 충실하도록 만들고, 백성을 거룩한 하느님의 봉사자로, 또한 그 상대로 만드신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판관들은 하느님의 영에 의해 등장한 인물들이었다. 삼손이나 기드온, 사울은 순박한 농부의 아들들로 스스로 기대하지도 않았고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반대 의사를 내세워 보지도 못한 채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들은 전혀 새로운 인물이 되어 자기 민족 안에서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는 사명을 수행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영'께서는 판관들의 손과 정신을 통해서 이집트에서의 탈출과 사막에서의 위업을 계속하시고, 이스라엘의 일치와 구원을 확보하시며, 거룩한 백성을 형성하는 기반을 건설하셨다. 그러나 판관들은 일시적으로 해방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께서는 그들의 임무가 완수된 다음 그들을 떠나신다.

그런데 판관들을 계승하는 왕들은 항구적인 직무를 맡는다. 왕들을 축성하는 기름 바르는 예식은 왕들이 하느님의 영으로부터 지워지지 않는 각인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냈으며, 또한 그들이 신성한 위엄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사무엘은 기름 채운 뿔을 집어 들고 형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야훼의 영이 다윗에게 내려 그 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1사무 16,13).

그러나 도유의 예식만으로는 왕들을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 만들어 이스라엘에게 구원과  정의와 평화를 보장하기에는 불충분하였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느님의 영께서 이끄시는 대로 그 맡은 바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영이 더욱 강하게 침투해야 했고, 메시아를 축성하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도유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사야는 메시아 위에 하느님의 영께서 내려오시어 머무르셔야 한다고 말한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이사 11,2).

이스라엘의 왕정이 멸망한 후에는 하느님의 영께서 예언자들에게 강하게 내리신다. 하느님의 영께서는 행동을 실현하는 새로운 인물을 불러내는데 그치지 않으시고, 당신이 행하시는 그 행동의 의미와 비밀을 알 능력을 함께 주신다. 그리고 예언자들에게 '슬기와 용기'뿐 아니라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길을 알도록 하신다. 하느님의 영께서는 예언자들에게 하느님의 영광까지 계시하시면서(에제 3,12) 하느님의 말씀을 알게 해주심과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심판을 예고하게 하신다. 이와 같이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영에 의해 증거자, 하느님을 직접 증거하는 사람이 된다. 그 후 하느님의 영께서는 야훼의 종에게 명백히 나타나신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 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이사 42,1).

여기에서 하느님의 영을 받은 야훼의 종은 다른 인생길을 펴주는 메시아적인 면을 보여준다. 따라서 하느님의 영께서 야훼의 종에게 내려오심으로써 야훼의 종은 에언자로서의 임무와 메시아로서의 임무를 완수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이사야 예언자는 이미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야훼의 종'인 모습으로 메시아를 예언하였다.

따라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와 동시에 하느님의 영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실 것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나는 너희를 회개 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마태 3,11)라고 하면서 '오시는 분과 성령'을 같은 분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요한은 성령을 상징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표징들 중에서 '불'이라는 단어를 취한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말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요한 자신이 당황할 정도로 인정해주신다.

그 증거로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때에 성령께서 신적인 모상으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나타나신다. 하늘로부터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요한이 베풀던 물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성령의 세례로 승화되었다.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은 이제 세례성사를 통해서 내려오시고, 물의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영원히 머물러 계실 것이다.

성령께서 예수님 안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세례 때에 비로소 나타났지만, 실은 그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였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세례는 소명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메시아로 임명되고 권한을 부여받는 것이었으며, 아버지에 의해 아들이 소개되고, 예언자들이 예언하였고, 아버지가 감추어 두신 '여기에 있는 나의 종'(이사 42,1)이 나타났음을 알려준 것이었다. 

구약의 판관들과 예언자들과 왕들은 불시에 하느님의 영에 의해 사로잡혔고 세례자 요한은 탄생하기 직전에 영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들처럼 예수님께 새로운 인품을 부여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께서는 예수님께서 존재하기 시작하신 첫 순간부터 예수님 안에 사셨고, 예수님을 존재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생활을 통해서 성령과 함께 행동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셨다(루가 4,14). 그분은 성령에 의해 악마와 대결하시고, 마귀들린 자들을 풀어주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성령 안에서 기쁨이 넘치셨다(루가 10,21). 따라서 구약에서 하느님의 영을 받을 때에는 영의 작용이 항상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으나 예수님 안에서는 성령께서 항구적으로 활동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말씀이다.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신다. 그리고 당신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여주신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생각하시면서 제자들을 험난한 세상에 보내시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신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세상에 나아가 박해의 위험을 항상 느끼면서 살아야 할 제자들에게 보호자가 되고 협조자가 되실 성령을 주신다. 이처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내리신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은 야훼의 종과 메시아의 사명을 다한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교회의 사명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오늘은 참으로 하느님께서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날이다. 뜻 깊은 날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모두 하느님의 깊은 사랑이다.